의료보장제도를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우여곡절 끝에 국회를 만장일치로 통과했으나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의해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국민의료보험법’이라는 생소한 법률에 의해 바야흐로 보건의료제도를 둘러싼 지배세력과 민중 간의 갈등이 본격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그동안 보건의료, 의료보험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의사와 간호사들의 흰 가운과 소독약 냄새 정도였던 국민들은 어떤 의도에 의해서인지 연일 신문지상을 장식했던 국민의료보험법에 대한 비난에 가까운 해설기사 (한겨레신문은 예외)를 읽으면서 뭐가 뭔지 모르지만 어렴풋이 국회를 통과한 새 법이 봉급생활자(즉 노동자) 대부분에게 대단히 불리한 것이라는 인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냥 누구에게나 좋은 제도인 것 같은 의료보험제도가 어떤 계층에게는 불리할 수도 있고 다른 계층에게는 유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즉 일정한 사회제도의 형식을 두고 특정한 계급, 계층의 이익이 갈등하며 대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이번 국민의료보험법에 대한 언론기관의 집중포격은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판별해내기 어려운 허위사실을 보도자료로 제공받고 그대로 기사화함으로써 생긴 에피소드였다고 보이지만 전정권 시절 전국을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했던 금강산댐에 의한 서울 수몰설코미디에 못지않은 여론조작의 실례로서 언론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왜곡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 진실을 왜곡한 허위보도들이 오히려 의료보험제도의 형식에 관한 국민의 관심이 고조되는 계기를 가져와서 일반인도 보건의료제도 속에 담겨진 자신의 이해관계에 관하여 촉각을 곤두세우고 보다 과학적인 인식을 향해 다가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에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는 한, 당연히 주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이던 이 분야에서도 계급, 계층 간의 이해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게 해주는 연구가 요망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보건의료분야에 관한 사회과학적 이해에 커다란 힘을 발휘하는 정치경제학적 연구를 간략히 소개하고 최근에 일어난 의료보장제도를 둘러싼 싸움들을 그러한 관점에서 소개해 보고자 한다.

  2. 보건의료의 정치경제학적 연구에 대하여
  보건의료 문제를 정치경제학적으로 연구한다 하면 언뜻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보건의료문제는 한 나라의 총체적 현실을 반영하는 한 분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보건의료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건강상태의 악화, 질병의 발생, 의학적 진단과 치료, 의료서비스(의료인, 약품, 의료기기, 의료시설의 총화로서)의 생산과 분배 등에 나타나는 사회구조적 원인들을 일컫는다. 특히 두 개의 계급이 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기본적 모순인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생산관계의 사적 성격의 모순이 보건의료 분야에서 어떤 형태로 반영되는가를 정확하게 이해하여 노동계급의 입장에서 그 해결을 지향하는 연구가 바로 보건의료의 정치경제학인 것이다.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보건의료를 자연현상으로만 보려 하거나 사회적 총체성과의 관계를 최소화하여 설명하려는 이론적 입장은 결과적으로 보건의료문제가 초역사적, 초사회적 진공의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하게 됨으로써 많은 제약을 갖게 된다. 그러한 입장들은 특히 사회구조적 원인과 떼어서 설명할 수 없는 보건의료 문제를 개인적이고 우연적인 현상으로 제시함으로써 현실을 왜곡시키는 이데올로기적 기능까지 수행하기도 한다.
  불행하게도 아직 우리 사회, 학계에는 그러한 관점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결과 개별적으로 접근하는 치료 중심적인 의료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접근하여야 하는 보다 더 큰 보건의료문제들, 예를 들면 결핵, 출혈열 등의 전염성 질환, 산업재해, 직업병 등의 노동자 보건, 농약중독, 농기계 사고 등의 농민 보건 등은 뚜렷한 문제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며 오히려 문제의 규모와 심각성은 날로 커져가고 있는 듯하다.
  한국에서의 보건의료의 정치경제학적 연구는 1980년대 초반의 시론적 도입단계를 거쳐 이제는 상당한 이론, 실천적 축적을 쌓았고 젊은 세대가 주축이 된 진보적 보건의료단체들의 실질적 활동 지침이 되는 단계에 와 있다. 특히 1987년 5월에 창립된 ‘보건과 사회 연구회’는 보건의료분야의 쟁점들을 이론적으로 정리해 내는 역할을 맡고 의료보장, 노동자보건, 농민보건, 여성보건, 보건사 등 여러 분과활동을 통해 정치경제학을 더욱 세련되게 현실에 구사하여 운동의 방향성을 과학적으로 잡아가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
  보건의료의 정치경제학에서는 질병발생의 원인을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적인 것으로 보고 그 해결도 사회적 변혁에서 구한다. 예를 들어서 세계에서 최고의 발생율을 보이고 있는 한국의 산업재해, 농약재해는 한국 노동자, 농민들의 비참한 사회적 조건과 연관되어 있으며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중이 대우받는, 민중이 주인인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심각한 수준에 와 있는 공해문제, 핵문제도 돈벌이에만 눈이 멀게 하는 경제제도, 약소민족의 생존을 무시하고 자국의 안전보장만을 내세우는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신식민지 지배 때문이라고 보며 민족 민주운동의 궁극적 승리만이 그 해결의 단초가 될 수 있다고 본다.

  3. 의료보장제도의 형태학
  의료보장제도는 의료에 대한 사회보장제도이다. 그러한 의료보장제도의 특수한 형식중의 하나가 의료보험제도인 것이다. 따라서 의료보험제도는 넓은 의미의 의료보장제도에 속한다. 그러나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즉 의료보장제도가 곧 의료보험제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그 사회의 조건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식이 있을 수 있다. 아마도 100개의 나라에는 100가지의 서로 구별되는 의료보장제도들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다종다양한 변종을 가진 의료보장제도는 그것 나름의 보편적 원리와 이론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의 영향에 따라 다양한 변형을 보인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변수는 국가의 재정수준으로 포함되는 경제적 조건과 일반적 민주주의와 국민의 정치참여로 표현되는 정치적 조건, 그리고 그 나라의 사회, 문화 속에 확산되어 있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조건 등이다. 의료가 거의 사회화되어 전 국민에게 무상으로 공급되는 사회주의 나라들의 의료보장제도와 의료가 돈을 주고 사는 상품으로 취급되어 구매력이 있는 계층에게만 공급되거나 그것을 싸게 사기 위한 방법으로서 보험방식들을 도입하는 자본주의 나라들의 의료보장제도의 차이점은 그러한 조건들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같은 자본주의 나라들 사이도 영국, 이탈리아, 뉴질랜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등과 같이 국민의료서비스(NHS : National Health Service)방식을 취하고 있는 나라들과 일본, 독일, 네덜란드 등의 국민의료보험(NHI : National Health Insurance)방식을 취하고 있는 나라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데 이것도 각 나라들의 의료보장제도 형성, 발전과정의 독특한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전형적인 NHS와 전형적인 NHI를 비교하면서 각 제도의 특성과 장단점들을 알아보면 표 1과 같다.
  이처럼 서로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다른 두 가지 제도가 그 나라의 의료보장제도의 형식과 내용을 둘러싼 계급투쟁의 양상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애초에 이데올로기적인 형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즉, 1963년 박정희의 군사통치 아래에서 만들어진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에 사회보장의 정의를 ‘사회보험에 의한 제급여와 무상으로 행하는 공적부조를 말한다’라고 못 박음으로써 의료보장제도에 형태가 사회보험인 의료보험과 공적부조인 의료보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고 서비스방식의 의료보장 요구는 마치 사회주의적인 것이거나 복지병을 가져오는 큰일 나는 제도인 것처럼 매도당해 왔던 것이다. 그 결과 모든 논의들이 의료보험제도라는 좁은 틀 안에서 벌어지게 되었고 보다 진보적인 제도인 NHS 제도는 그 존재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전선의 열세는 대중의 끓어오르는 변혁적 요구가 의료보험방식 안에서의 사소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으로 변질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4. 국민의료보험법 거부권 행사의 의의
  -결론에 대신하여
  1988년 벽두부터 전국의 농어촌에서 활활 타올랐던 농어민들의 의료보험에 대한 저항운동은 무엇보다도 과중한 의료보험료 부담 때문에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의료보험료의 완전한 면제를 요구하는, 즉 조세방식의 재원조달인 NHS를 본능적으로 요구하는 경우도 있으나 어쨌든 보험료 부담의 경감이 일차적인 목표였다. 위에서 언급한 이데올로기전선, 이론역량의 불리함 때문에늘 ‘조합해체, 통합일원화 쟁취’ 라는 슬로건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의료보험의 단순한 통합일원화는 실질적 성과의 내용이 의심스러운, 경우에 따라서는 농어민에게 더욱 불리할 수도 있는 위태로운 목표였다.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입법과정에의 개입, 국가독점자본과는 상이한 입장에 처해있는 의료인집단과의 연대, 반민중적 정당에 대한 점거농성투쟁 등으로 결국 최종적인 획득물인 ‘국민의료보험법’ 속에 단순통합일원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농어민과 민중일반의 보험료 부담을 획기적으로 경감시킬 수 있는 누진율에 관한 조항이 들어감으로써 커다란 성과를 얻게 된다.
  그러나 누진제 통합일원화가 저소득층의 부담을 줄이는 대신 고소득층의 부담을 늘리는 실질적인 진보임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일부세력은 단순통합일원화의 경우에 예상되었던 문제점들을 새삼스레 제기하고 상식이하의 엉터리 통계를 발표하는 등 새 법에 대한 대대적인 흑색선전을 감행한 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써 일년 간에 거친 싸움의 성과를 무효화하려 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농민단체와 보건의료단체가 주축이 된 ‘전국의료보험대책위원회’에서는 거부권의 행사를 저지하기 위한 항의대회를 개최하는 등 투쟁의 성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소위 ‘막판뒤집기’식으로 아슬아슬하게 따내었던 누진적 보험료 부과라는 진보적 내용을 가진 ‘국민의료보험법’은 그동안 독점자본과 국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수탈당해 온 농어민, 저임금 노동자, 도시빈민 등의 저소득 민중계층이 독점자본 중심의 의료보험제도 속에서 상대적으로 직업적 기득권을 양보당해 온 의료인 계층과 일시적으로나마 제휴하여 만들어 낸 전과물이었다. 모든 진보는 투쟁에 의하여서 얻어지고 유지되는 것이다.
  보건의료분야의 연구는 그 대중적 이해와 요구의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민중의 과학적 입장이 제 모습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결국 NHS냐 NHI냐를 둘러싸고 전개될 이 분야에서의 민중과 지배계급의 격돌과정에 청년 학생과 지식인의 적극적인 참여가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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