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기, 목적의 노예가 되지 않는 법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은 작가로서 글을 쓰는 이유를 “가장 따를만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모든 행동, 모든 인생에 질문을 달며 살아라. 그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없어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목적의 노예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스스로를 되짚어 묻는 질문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기억이 물건의 가치를 좌우할 때가 있다. 추억이 깃든 것은 더 소중히 여겨지고, 하나의 물건이 사람과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경우엔 아프고, 어떤 것은 기쁘며, 어떤 기억은 깊은 생각을 준다.

얼마 전 오래된 차 한 통을 찾았다. 대략 4,5년은 지난 것이다. 차의 이름은 봉황단총(鳳凰單叢), 중국 광둥(廣東) 지방 어디쯤에서 만든 반발효차라 했다.
어느 봄날 누군가로부터 선물 받았다가 그 동안 잊고 지냈다. 차에 대한 조예가 없어 그 격과 질을 알지 못하나 맛은 순하고 향이 좋았다.

차를 마시는 내내 차를 건넸던 이가 떠올랐다. 그는 중국을 오가며 차와 다구 등을 가져다 팔던 상인이다. 무역을 하다가 마침 차에 눈을 떠, 다시 그것으로 생업을 삼았다고 했다. 눈썰미가 좋고 심미안이 있어 그가 구해오는 차들은 무척이나 좋았다. 베이징이나 윈난(雲南)의 오래된 차시장을 헤매고 다니지 않으면 구하지 못할 차들을 적당한 값에 팔던 터라 종종 신세를 지곤 했다. 그는 자신의 성품대로 장사를 했다. 사람을 좋아했으며 깍쟁이처럼 이익만을 위해 마음을 뒤집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때문인지 그의 차방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느 해 막 봄이 시작되는 날 차를 구하러 그의 차방엘 들렀다. 차 한 통을 사고, 차 한 주전자를 나눠 마셨고, 더불어 새로 들여온 것이라는 차 한 통을 선물 받았다. 그것이 봉황단총이었다. 보답으로 나는 그에게 책 한 권을 주었다. 그 후로 그를 보지 못했다. 몇 달이 지나 그곳에 들렀으나 문은 닫혀있었다. 소식도 끊겼고 종적을 알 수도 없었다. 신상에 변동이 생겼던지, 워낙 박한 이문의 장사라 그만 접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했을 뿐이다. 그리고 오래도록 그를 잊고 지냈다.

 
차통을 열면서 조용하면서도 사람 좋던 그의 웃음을 생각했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어떤 물건에 묻어 오래도록 남아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신비롭다. 차를 우리며 또 그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이 차가 없었다면 그에 대한 기억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가 건넸던 책 한 권을 아직도 갖고 있을까. 어느 심란한 밤, 책 속의 문장 하나가 그에게 나의 기억을 떠올리게 할까. 황갈색 차를 따르며 생각은 깊어졌다.

어떤 장소나 물건이 누군가의 기억을 살려내는 것을 보면, 기억은 의식의 내면 뿐 아니라 감각의 외부에도 깃들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차를 팔던 이가 그가 남긴 차 한 잔으로 되살아났듯이 문득 우리들은 타인에게 무엇으로 기억될까를 고심하게 됐다. 한 잔의 차로 비롯된 생각은 이윽고 멀리까지 나갔다.

자본주의의 가치는 단순하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좋은 물건을 싸게 파는’ 옛 상인들의 태도와는 일정한 선을 긋고 있다. 오랜 전통 속의 상업은 이익 위에 사람 사는 도리가 있음을 잊지 않았다. 상인에게도 상도(商道)가 있음을 자랑스러워했다. 차를 팔던 그는 과거 몇 차례 사업의 실패를 거치면서 늘 묻게 됐다고 했다. 자신이 그 일을 왜 하는지?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 왜 하필이면 차를 파는지... 한 번 시작된 질문은 해답을 주기보다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성과만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묻지 않았을 질문들이다. 자본주의는 과정과 수단에 대한 고민 보다 그 성과에 더 크게 주목한다. 좋은 상인보다 성공한 사업가를 더 높이 산다. 좋은 학생, 좋은 스승, 좋은 학교에 대한 평가는 높은 성적으로 취업률을 높이며 더 큰 건물을 자랑하는 일로 바뀌었다.

차를 팔던 그는 자신의 일을 “가진 재능과 자산으로 사람들이 더불어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했다. 그가 사라져 버린 지금 자본주의적 성취보다 상도를 중시했던 대가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차방이 있던 곳을 지날 때 마다 한 사람의 부재를 아쉬워하고 좋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할 뿐이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도(道)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은 신산(辛酸)한 삶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가치를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Why I Write)’에 적어두었다. 작가로서 글을 쓰는 이유를 “가장 따를만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불의를 감지하고 시대가 만든 잘못된 제도에 저항하며 인간의 평등을 말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 자신의 신념을 다만 ‘헛소리’에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는 스페인 내전에서 전체주의에 맞서 국제여단의 일원으로 총을 들기도 했다. 세상의 호평을 받는 작품을 쓰고 나서도 그를 사로잡은 것은 역시 ‘나는 왜 쓰는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그가 질문을 멈추었다면 그의 작가정신도 빛을 잃었을 것이다.

상인이거나 작가이거나, 학생 또는 스승 모두가 질문을 던질 수 있기를 바란다. 질문을 그칠 때 우리의 성장은 멎고 정신은 욕망의 덫에 갇히게 될 것이다. ‘나는 왜 배우는가?’, ‘나는 왜 가르치는가?’, ‘나는 왜 이일을 하는가?’를 늘 물었으면 좋겠다.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없어도,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한 목적의 노예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스스로를 되짚어 묻는 질문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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