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두려워 하지 말고 도전하라
우리나라는 지난 1월 30일, 자력으로 개발한 최초 우주발사체인 나로호(KSLV-I) 발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자국 발사대에서 로켓을 쏘아올려 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킨 이른바 ‘스페이스(우주) 클럽’에 11번째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우주를 향해 한 층 더 나아간 나로호의 발사 성공의 뒷면에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나로호발사추진단장 조광래(전자공학과82졸) 동문이 있었다. 한국 우주 개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조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지름길을 찾기 보단 차근차근 실행해라지난달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나로호 발사 성공 기념 특별포상 수여식에서 훈장을 수여받은 조광래 동문은 처음부터 로켓 개발에 관심이 있었을까? 조 동문은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있었기에 특별히 우주로켓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답했다.
“내가 로켓 개발이란 분야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박사학위를 받았던 1988년,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전자통신연구소에 입소하면서 우연히 시작됐다고 볼 수 있지요. 당시 나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었고, 그 중 한 선배가 나에게 로켓 쪽을 한번 연구해보지 않겠냐고 제의를 했어요. 그 제의가 바로 내가 우주로켓이라는 분야를 처음으로 연구하게 된 시작점이었어요.”
당시 우리나라는 우주 개발 강국인 러시아, 미국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주 개발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열악했었다. 처음에 조 동문은 관측로켓(Sounding Rocket, 관측 장치와 송신기를 탑재하여 발사되는 로켓으로 대기밀도, 온도, 우주선, 태양전파 등을 관측한다) 수준의 연구를 수행했고, 우리나라도 우주로켓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조 동문은 동료들과 함께 우주로켓 개발 계획을 수립하여 정부의 승인을 받아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고 전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우주발사체를 개발하는 것이기에 정부의 승인을 받는 것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무엇보다도 연구 개발에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기술 그 자체였다. 조광래 동문은 “우리나라의 우주로켓 개발 역사는 매우 일천합니다. 따라서 축적된 기술 수준도 매우 부족한 편”이라며,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기술 개발의 어려움에 봉착했다”고 말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로호의 위성을 위성 궤도에 투입하는 역할을 하는 킥모터의 개발 과정에서 어려운 난관을 겪었다. 킥모터 개발 중에 대형 폭발사고가 발생하여 연소시험시설이 남김없이 다 타버린 것이다. 하지만 대형 사고도 조 동문과 연구원들의 열정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조 동문은 “연구 개발에는 왕도가 없을 뿐더러 지름길도 없다”며, “비록 어쩔 수 없는 어려움에 부딪혔지만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연구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기에 더욱 열심히 연구했다”고 말했다.
3차례의 실패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
조 동문은 나로호를 개발하기 이전에 우리나라 최초의 액체추진 과학로켓인 KSR-Ⅲ를 개발하는 연구를 수행했으며, KSR-Ⅲ는 2002년 11월에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조 동문은 당시를 회상하며, “당시에 내가 개발책임을 맡고 있었지요. KSR-Ⅲ 사업을 수행하면서 나로호 개발사업의 기획을 병행하여 2002년 8월에 나로호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어느새 나로호 개발 사업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개발책임자로 참여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됐어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조 동문은 나로호발사추진단장으로서 모든 일을 진두지휘하는 만큼 책임감도 무거웠다. 더욱이 나로호의 발사는 그리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9년 1차, 2010년 2차, 2012년 3차 발사에 실패했고, 조 동문은 큰 중압감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잇따른 실패에도 조 동문은 나로호 발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개발 계획에 전념했으며, 최근까지도 조 동문은 공황장애 진단을 받아 매일 신경안정제를 복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정성과 연구원 수십 명의 노력은 결국 나로호를 우주로 보내는 거름이 됐다. 지난 10여 년 간 밤낮으로 연구한 조 동문과 연구원들은 개인의 생활까지 포기한 채 묵묵히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나로호의 발사 모습을 보고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로호 발사가 성공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치 지난 25년간의 기나긴 수업에 대한 기말고사에서 낙제를 면했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국가의 투자와 국민들의 성원으로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로호에만 약 11년의 시간을 보낸 조 동문. 조 동문은 나로호 발사가 진행되는 최종 9분, 540초 동안 가슴이 떨렸다고 한다. 조 동문의 모습에서 우주 로켓 개발과 함께한 인생을 엿볼 수 있었다.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겸허한 마음 가짐으로 생활하는 것이 중요해요. 진부한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성실하고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 동문은 덧붙여 “우리 삶의 본질이 힘든 것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인생의 9할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죠. 그렇기에 저는 더욱 더 견디고, 참아내고, 기다리는 자세로 생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성실과 절제를 강조하는 조 동문에게 대학 생활에 대해 물어보았다.
“내가 재학했던 1978년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1, 2학년 때 방황의 시간을 많이 보낸 것 같아요. 그 땐 학과수업보다 불교학생회 활동을 더 열심히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군요. 연등 축제를 위해 교내에서 설치하는 연등 제작, 설치 작업 그리고 제등 행렬 등을 준비하기 위해 동아리방에서 숙식하는 날도 많았지요(웃음).”
하지만 2학년 말, 조 동문은 겨울 방학부터 도서관에서 ‘전자공학의 기초’라는 책 한 권을 거의 다 외우다시피 했다. 학과 생활에도 전력을 다 했으며, 학과의 간부 역할까지 맡아 적극적으로 학교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 때 지도 교수이신 윤현보 교수님을 뵙게 되어 오늘날까지 사제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지요. 이번 발사까지 지도 교수님께서 많은 격려와 성원을 보내 주셨고, 발사 당일에도 교수님을 만나 뵙는 꿈을 꾸고 발사에 성공했지요. 저에게 동악이란 아련한 향수(鄕愁)지요!”
학사 학위 뿐만 아니라 석사(1984년), 박사(1988년) 학위까지 우리대학에서 받은 조 동문. 우리대학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조 동문은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고 싶을까.
“실패가 없었다는 것은 도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실패가 두려워 도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요. 특히, 청춘의 피가 뜨거울 때 도전하는 것이 젊음의 특권 아니겠어요! 도전하십시오.”
앞으로도 한국형 발사체를 계속 연구할 예정이라고 말하는 조 동문. 끊임없이 우주를 향해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는 조 동문의 모습에서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는 우리나라의 우주 개발 기술을 상상해본다.
조광래 동문 프로필 △1959년 출생△동국대학교 전자공학과 1982년 졸업 △1988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초고차파공학 박사 △1988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 △2000년 우주기반기술연구부 로켓체계개발그룹장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나로호발사추진단 단장 △2013년 과학기술훈장창조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