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감 일로 ‘어필’하는 공간예술

모든 것 잊어버리기 위해 그림 그려
남화백 ‘에스프리’의 연원은 한국과 동양

  “藝術(예술)이란 아주 본질적인 것으로 作品(작품)에 단순히 藝術(예술)이란 옷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作家(작가)의 思考(사고)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無(무)형식의 것이 아닐까. 그 중 미술은 공간예술로서 캔버스 위에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사실 같은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南寬(남관)화백.

  印象派(인상파)이후 현대 추상파에 이르기까지 美術(미술)의 宗家(종가)인 프랑스 ‘파리’시절부터 ‘西洋(서양)의 마띠에’를 빌어 東洋(동양)을 표현한 그의 작품엔 李朝(이조)백자와도 같은 한국의 소박한 전통이 흐르고 있다. “현대에 와서 공간예술은 조형예술이며 조형이란 입체적인 것을 뜻하고 뚜렷한 공간은 뚜렷한 입체로서 어느 예술보다 공간예술이 직감적으로 어필할 수 있으며 미술은 그러한 直感性(직감성)에 生命(생명)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순간적 ‘인스프레이션’으로 잡는 힘을 갖지 못하면 미술에서는 무의미한 것이며 공간예술의 특성은 구체적인 문제는 중요시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작가의 시각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므로 색채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조용히 한 마디 한 마디 마치 예술을 음미하듯 말하는 南寬(남관)화백의 캔버스에는 “그림을 그리는 일밖에 모른다”는 그의 말처럼 항상 고독이 스며 있으나 老大家(노대가)의 표정은 한마디로 천진스럽다. “24세 때 ‘모디리아니’의 半身裸婦像(반신나부상)을 접하고 몸이 떨렸었다”는 그의 ‘에스프리’. 美(미)에의 탐닉과 창조과정에서 수많은 역경을 겪은 그의 예술은 1954년 渡佛(도불)하여 귀국 전까지 ‘파리’畵壇(화단)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널리 알려졌었다.
  전쟁의 체험. 6ㆍ25 때 그의 ‘아뜰리에’(한강변 명수대)에서 볼 수 있었던 역사의 현장. 강물에 떠내려 오던 시체, 死者(사자)의 표정 그것들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가슴에 못 박혔다고. 그 때 인지한 강렬한 ‘에스프리’는 그가 外國(외국)에서 우리 것이 그리울 때 지울 수 없었던 영원한 畵想(화상)이었던 것 같다.

  프랑스의 유능한 평론가 ‘장ㆍ자크ㆍ레벨’도 “南(남)화백은 유행을 따르기보다 내부의 고민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작가”라고 평했다. 그 때부터 그의 作品(작품)은 ‘모디리아니’의 不滅(불멸)같던 寫實(사실)에서 벗어나 좀더 精神的(정신적)인 곳으로 가야 했으며 마침 파리에서 유행한 ‘앙포르멜’(추상운동)과 일치했다고 한다.
  그 후 원숙의 경지를 들어서면서부터 곰팡이가 피어있는 오랜 都市(도시)의 ‘이미지’라든가 허물어진 고적과 돌담, 전쟁의 폐허는 현란한 추상의 세계였으며 마침내 ‘환타지ㆍ오리엔탈’의 극치에 이르게 되었다. “평론가들은 나의 그림이 東洋(동양)과 서양을 융화시킨 세계라는 말을 곧 잘했다. 특히 파리 국립 현대 미술관장 ‘베르나르ㆍ도리발’은 내 작품의 그 점을 좋아했다”면서 “결국 나의 作品(작품)에 담기는 나의 ‘에스프리’(정신)의 淵源(연원)은 한국이며 동양이다. 나는 西洋人(서양인)이 아니며 韓國人(한국인)”이다.
  그러나 藝術(예술)의 태양이 偏愛(편애)한 곳 ‘파리’, 요행이나 거짓이 통하지 않는 냉혹한 ‘몽마르트’시절의 그에게는 ‘人生(인생)의 문제에 비하면 藝術(예술)은 또 너무나 조그마한 것 같았다’고 한다. 그의 역경은 전쟁 그것과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세잔느’가 광인이란 별명을 감수해야 했고, ‘고호’가 ‘상ㆍ레이’의 정신병원에서 권총자살을 했듯 그의 藝術(예술)은 “人生(인생)의 역경, 그것을 잊기 위한 無我(무아)의 발버둥”이었다고.
  “모든 걸 잊어버리는 순간이 가장 위대한 순간이며 그 모든 것을 잊기 위하여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 좋은 例(예)로 “나는 비록 가톨릭에서 쫓겨나긴 했으나 나에게는 그것보다 더 위대한 자신의 종교가 있다. 그것은 나의 作品世界(작품세계)다.”라고 한 ‘오귀스트ㆍ로댕’의 말을 인용한다.

  그러나 “귀국 후 어쩐지 作品(작품)활동이 부진해져 가고 있다”면서 作品(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쉽다고 한다.
  ‘파리’에서는 作家(작가)에게 훌륭한 作品(작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단다.
  作家(작가)에게는 畵商(화상)이 있으며 畵商(화상)에게는 화랑과 고객이 있다. 이 땅에서는 “作家(작가)는 作品(작품)보다 교제와 정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世界(세계)의 조류를 무시할 수 없다고. 소위 추상이라고 해서 무조건 반발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 나름으로 소화해야 된다고. 금년 국전 최고상 수상작 ‘관혁’ 역시 “한국적인 것이라기보다 기교에 있어서 西歐(서구)의 기교 그것을 소화했기 때문에 뛰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브락크처럼 그 人間(인간)과 作品(작품)을 함께 잊을 수 없는 作家(작가)가 없어 ‘브락크’를 최고의 화가로 꼽는 그는 자신의 작품 중에서 현재 ‘룩셈부르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글자가 있는 구성’이 마음에 든다고 한다.
  그의 작품 활동은 프랑스에서 58년부터 ‘살롱ㆍ드ㆍ메’(파리)에 출품한 것을 비롯하여 66년 ‘망똥’繪畵(회화)비엔날레에서 영예의 大賞(대상)을 획득했으며 파리에서 뿐만 아니라 全(전)유럽에서 9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서독 이태리 영국 룩셈부르크 등 유럽 각지에서 순회전을 열었으며 단체전이나 招待展(초대전)에서 출품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의 作品(작품)이 ‘파리’국립현대미술관, 시립현대미술관, ‘룩셈부르크’국립 미술관을 비롯하여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그리고 ‘이탈리아’의 ‘토리노’미술관, ‘벨기에’ 등 이름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일.
  68년 귀국 후 國展(국전) 서양화 분과위원장, 69년 國展(국전) 서양화 非具象(비구상) 분과위원장, 70년 國展(국전)운영위원으로 있으면서 현재 홍익대학에서 강의(실기)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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