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에서 사색 즐겨 11년 세월을 병상에서

  지금의 우리는 비록 4ㆍ19를 겪은 世代(세대)가 아니지만 장엄한 함성의 기억이 아직은 선명하다.
  그날이 간지 어언 11년―. 차츰 희미해져가는 관심 속에 그날의 恨(한)을 새기며, 그러나 보람 있는 아픔을 11년 동안이나 참아온 4ㆍ19의 主役(주역)이 있다. 本校(본교)에 在學中(재학중) 不義(불의)에 항거하다 흉탄에 맞아 병원에 입원, 11년 동안이나 투병生活(생활)을 하고 있는 金(김)반우(32세) 同門(동문)의 병실을 노크했다.
  金同門(김동문)은 그동안 聖母(성모)병원 등 네 곳의 병원을 전전, 65년부터 원호병원으로 옮겼는데 정부로부터 원호수당을 지급받아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다.
  그가 4ㆍ19의 노도 속에 앞장선 것은 農經科(농경과) 1學年(학년)시절. 4월19일 本校(본교)데모대의 최선봉에서 경무대를 向(향)해 돌진했다. 그 때 대열의 앞에서 한 학생이 쓰려져 죽자 울분이 치민 金同門(김동문)이 “물러가라!”하고 소리를 지르는 순간 무차별 사격을 받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의식을 되찾기는 두 달 후인 6월 중순.

  金同門(김동문)의 오른쪽 턱밑에서 뒷목줄기로 뚫고 나간 독재자의 총탄은 척추신경을 끊어 手足(수족)을 제대로 못 놀리게 된 비극을 가져다 준 것이다. 11년간의 투병과 어머니 鄭今準(정금준)여사의 극진한 간호로 “이제 많이 나아서 손이 말을 잘 듣지는 않지만 굵은 색연필로는 몇자 정도의 글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아직도 보행이 자유롭지 못해 ‘휠체어’에 몸을 싣고 때때로 사색을 즐긴단다.
  요즘은 주로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그는 64년 학교 당국의 특별한 배려로 病床(병상)에서 ‘명예農學士(농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金(김)동문의 거대한 인생의 꿈은 자유수호와 맞바꿔버린 것.
  金同門(김동문)은 지난해 다른 병까지 겹쳐 3월부터 6월까지 3개월간을 성심병원에서 세 번의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감회 깊은 4ㆍ19 10주년을 수술대 위에서 보낸 것이다.
  金同門(김동문)은 “할 얘기가 많은 것 같은데 잘 안 되네”라고 띄엄띄엄 말을 이으면서 모교와 후배들에 대한 情(정)을 얘기했다.
  주로 월남전 상이용사들이 치료를 받고 있는 원호병원 환자들은 모두가 ‘자유수호’를 체험한 사람들. 때문에 金同門(김동문)은 시국에 관한 얘기를 서로 나눌 때가 많다면서 “젊은이는 항상 정의와 역사의식에 투철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한다.
  記者(기자)와의 작별도 퍽 아쉬워할 만큼 찾아주는 이 하나 없는 병실. 그러나 4월의 햇살은 가볍게 비치고 있었다.
  金同門(김동문)의 주소는 영등포구 오류동 국립원호병원 201號室(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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