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 단편 산책

‘시추에이션’포착 못한 현대인
허무한 행동으로 끝난 회의ㆍ갈등

  우리들 해방된 정신만이 비로소 열아홉 세기동안 오해하여 온 것을 이해할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 어떠한 다른 허위보다 더욱 성스러운 허위에 대하여 도전하고 할퀴는 저 본능이자 정열이 되는 기막힌 성질을…… -니체-

  1, 망명한 문학의 諸價値(제가치)
  오늘문학이 오늘인간과 그 세계에 제시한 휘황했던 ‘스트립ㆍ쇼’式(식) 映像(영상)은 따분하며 더욱이 비참하다.
  그렇게도 인간생활의 정신적, 도덕적, 철학적 핵심을 구성했고 정말 그렇게도 극성스럽게 인간의 명예와 위신과 그리고 권리를 부여했었던 문학의 다양한 諸價値(제가치)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거나 아니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망명해 버렸다.
  바야흐로 文學時代(문학시대)는 헤어날 수 없는 臨終(임종)에 처해있다.
  ‘시이닉’한 늙은이 ‘존오스본’이 태만한 현 지식층에 씹어뱉은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던 그 막중한 고발장이 아직은 생생하더라도 20세기문학의 ‘유토피아’는 “바이블”의 한 모퉁이를 치장했던 바벨탑에 불과하다.
  하지만 가혹한 우리들 시대의 문학적 소용돌이와 對決(대결)하려는 기특한 ‘선인장族(족)’(헤밍웨이)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문학의 숱한 諸神(제신)들은 오늘세기 앞에 한마디 충고는 물론 하찮은 변론도 없이 녹ㆍ다운 당하고는 어디론가 깊숙이 퇴장하는 게 문학적 생명이었다.
  헤밍웨이는 그래서 그렇게 끙끙대었지만 그의 작품은 너무 老鍊(노련)하다. 아니 차라리 낡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노력에도 현대인은 모든 가치역사를 다시 돌릴 인간적 ‘시추에이션’을 아직은 포착하지 못한 채 멍청히 서있을 뿐이다.

  2, 生(생)과는 이별한 存在(존재)들
  ‘헤밍웨이’의 <女子(여자)없는 世界(세계)>(1927年刊(년간))에 졸고 있는 작품은 고작14편에 불과하다. 이들을 통독한 후의 심정은 오래 오래 ‘버라이어티ㆍ쇼’에 유혹당했었다는 막심한 후회다. 무엇보다도 작품속의 人物(인물)들은 이 사실을 잘 기록해 주고 있다.
  다만 그래도 기특한 헤밍웨이의 자랑이라면 그의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꽤 타락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그 살인의 순간을 감각 없이 고대하며 흐린 눈망울로 창밖을 응시하는 ‘殺人者(살인자)’의 비겁한 ‘오울ㆍ앤드레슨’씨와 오직 동물과 그것도 반은 실성한 검은 투우와 마구 휘두르는 호흡이 거친 ‘잭’과 <싱거운 얘기>의 ‘그’와 <이제 몸을 누이고>의 ‘나’는 허망했던 생활과 자질구레한 추억에 얽매여 전전긍긍하는 노인이며 노이로제환자다.

  한편 두 개의 순전으로 고민하는 ‘열 명의 인디언’에서의 젖비린내 풍기는 아동 ‘닉’. 십자가의 의미를 현대 십자가의 그것과 비교하여 낑낑거리며 힐문하고 있는 <오늘은 金曜日(금요일)>의 반반한 세 병사도 있고 눈알이 튀어나오면서 까지 ‘젠틀맨ㆍ십’을 발휘해 ‘개새끼들’이라 아우성, 아니 절규하는 <5萬(만)달러>의 ‘잭’도 있다.
  끝으로 <簡單(간단)한 尋問(심문)>의 ‘피닌’같이 실은 허위로 위장된 인생을 살면서도 그 위장의 견고한 껍질을 깨트리지 못하는 나약한 젊은이도 있고 아울러 <앞지르기 競走(경주)>의 ‘캠벌’…등. 이 이상은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 없다. 한마디로 충분하다. 오늘문학의 주인공들은 과연 누구며 어떤 형태의 소유자들인가? 그건 툭하면 인용되던 시저나, 패배자이며 한때는 영웅이었던 나폴레옹型(형)은 결코 아니다.
  그건 아리송하게도 몹시 예리하게 조명된 룸펜이나 속물 아니면 착취자와 아첨꾼, 게다가 비열한 폭군들이다. 요약하면 생활과는 끝장이 난 존재들이다.
  이들이 오늘의 주인이며 헤밍웨이작품의 호주들이며 ‘갤런트’들이다. 아울러 경향적 작품세계의 ‘톱ㆍ스타’들이다. 그 이유와 증거를 간단히 찾아보자. 어째서 이들이 오늘의 영웅인가를 몇 개의 작품을 통해 해명해보자.

  그러기 위해서 우선 그래도 조금은 쓸 만했던 19세기적 답답한 작품을 눈여겨보자.
  <헤르만과 도르테아>(괴테)나 <당위와 소유>(구스타프ㆍ프라이타크) 게다가 ‘슈티프터’의 <滿(만)>…등. 이들이 조작했던 심장 없는 인물들은 벌써 사생아가 돼버린 지 오래다. 절박한 긴장도 해묵은 갈등도 그 흔한 한 발의 엽총소리도 허용치 않던 이 작품들의 서정시적 풍경은 퇴색된 지 오래다. 무턱대고 그저 평화롭고 한가로웠던 그때의 한심한 ‘매너리즘’에 휘청됐던 19세기식 인물과 사회, 이 사춘기의 덜 익은 시민사회는 핏기 없는 ‘리히더’와 ‘슈핏 쯔베르’와 아주 의좋게 사라져갔다. 그것도 척박한 한권의 ‘덤핑’으로 사라졌다. 이제 ‘나이트ㆍ십’의 질긴 유산도 20세기의 생경한 ‘프롤로그’ 앞에 혼비백산이 되어 깊은 문학연감 속에 망명처를 찾았다. 이 화려한 퇴장의 ‘피날레’를, 기울어져가는 대중사회의 정처를 <최후의 청교도>(Gㆍ산타야나), <유리동물원>(테네시 윌리암), <붓덴브록트 一家(일가)>(토마스만)는 깔깔되며 허나 悲歌的(비가적) 수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결국 오늘 작품의 핵심적 주인공들이 이 작품들 속에서 이미 그때부터 호흡하기 시작했다. 그럼 이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설명하며 어떤 인상을 주고 있는가?
  이 문제를 관찰하기 전에 작품의 구성과 ‘테제’설정을 미리 훑어보자.
  헤밍웨이는 졸렬하나 한 개성을 가진 인물과 그 인물이 항상 호흡하고 있는 사회와의 갈등을 명시함으로써 자신의 어떤 주의주장보다 구체적 행동을 통해 그런대로 작품의 주체는 우리를 매혹시키고 있다.
  허나 그의 무엇보다도 큰 과오와 실수는 작품적 긴장감을 주고 작중인물의 내적심리를 충분히 내보일 주인공의 효과적이며 구체적인 대척물이 아무리 해도 희박하다.

  이를테면 <殺人者(살인자)>의 ‘오올ㆍ앤드레슨’을 독자가 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는 ‘데이터’가 없으며 <敗北(패배)를 모르는 사나이>의 ‘잭’과 <五萬(오만) 달러>에서 역시 ‘잭’을 평가할 줄 모르는, 정신이 마비된 사회와 시민이 너무나 모호하게 묘사돼있다.
  그 결과 인물들이 구체화하고 있는 作中(작중) 분위기에는 착하다보니 순진하기까지 한 체취가 그들(주인공과 작중인물) 행동에는 거의 나타나있지 않다.
  그래서 투우와 자연과 죽음과 사투하면서 초인적인 힘으로 비틀대며 버티고 있는 ‘매뉴엘’과 ‘매뉴엘’의 내부에서 솟구치는 본능, 사경의 의식, 절망 그리고 냉담까지도 ‘센티멘탈’하게 보인다. 첨부하면 ‘잭’의 질은 인간적 회의나 갈망까지도 감상적이며 허무한 ‘액션’으로 끝나고 만다. 이제 무모한 행동의 인물들을 끝으로 확대시켜 본다.
  오늘의 철학자들은 현대인의 절대적 행복을 시기해온 조그만 덩어리가 비통한 생각과 사념과 절망과 공포였다고 무의미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또한 그 무의미한 진단을 내린 후 그 치료법으로 가해자적 책임에서 늙은 헤밍웨이는 <五萬(오만) 달러>의 ‘잭’과 <敗北(패배)를 모르는 사나이>의 ‘매뉴엘’을 조각해놓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래서 ‘매뉴엘’에게는 운이 사나워 한밤의 총성에 입는 관통상이 아니라 투우의 검붉은 두 뿔이 관통하는 좀 잔학해진 상황 속을 그래도 인간의 승리와 정복을 위한 거친 의지와 용기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대체 오늘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어느 정도 용기와 충동을 줄 수 있었는가?
  오늘의 대다수의 작가는 너무도 태만하며 무기력하며 설득력도 상실했다. 헤밍웨이의 ‘매뉴엘’과 ‘잭’이 패망했듯 오늘작품의 주인공들은 패망한 것이다. 오늘 작품은 절망을 초월하는 또 다른 불사조가 아니라 예언하고 행동하기를 거부해버린 과거의 나태한 인간부각에 신경을 곤두세운 방관자이거나 한 관찰자로서 그 사명을 끝내고 있다.
  버리지 못하는 한 문학시대의 임종은 더욱더 긴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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