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항일운동의 숨소리가 들린다

  들어가며
  11월 27일, 서대문형무소를 동행 취재하기로 약속한 날이었는데 새벽부터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취재장소가 야외이고, 게다가 동행해줄 분이 70이 넘은 어른이라 혹시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때쯤 하늘이 맑게 개었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내려 4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 약속 장소가 있는 독립관이 바로 보였다. 독립관은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곳으로, 건물 아래층에 바로 그 분이 회장으로 있는 순국선열유족회 사무실이 있다.
  이종갑(74세) 회장.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는 우선 그의 할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야. 할아버님은 초기에 의병운동을 하셨어. 이인영이라고. 자주권을 되찾기 위해 한말에 의병을 일으켰지. 전국 의병 총대장으로 활약을 했는데, 성공을 못하셨어”라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며, 금고인 듯한 곳에서 종이 한 묶음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이게 뭔 줄 아나? 바로 우리 할아버님이 경성재판소에서 사형언도를 받았는데, 그 때의 판결문이야, 그리고 여기 서대문 형무소 그 때는 경성감옥 이었는데 여기에서 교수형을 당하셨어”

  역사의 현장
  사무실을 나와 독립관 위쪽에 위치한 서대문형무소 쪽으로 함께 걸어갔다. 2-3분 걸어가니 빨간 담장이 보였다. 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제일 처음 볼 수 있는 것은 흰 건물의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이다. 일제시대 보안과 청사였던 이곳은 고문과 취조가 주로 행해졌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형무소가 처음 들어섰던 1908년부터 해방해인 45년까지의 이곳 역사를 한 눈에 전시해 놓은 하나의 전시장이다. 1, 2층에는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와 옥중 생활 등을, 지하에는 임시구금실과 고문실을 복원, 잔혹한 고문모습들을 문헌과 고증을 통해 재현해 놓았다. “여기가 바로 우리 할아버님이 고문을 당한 곳이야”라며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두컴컴한 지하전시실을 빠져나왔을 때, 한 눈에 들어오는 빨간 벽돌의 옥사는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옥사 안으로 들어가니 묘한 기분과 냉랭함이 온 몸을 감쌌다. 돌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는 무서울 정도였다. 난방시설은 없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오히려 되물었다. “난방시설이라고? 그러면 동사자나 몹쓸 병이 그리 많이 생겼겠어? 게다가 이불도 2명에 1장 꼴밖에 안되었는데” 감방 안에는 변기통이 있었는데, 나중에 한 교도관으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로는 감방 안에서 변을 보고 그대로 방치해 두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 냄새가 사람을 질식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이것 또한 하나의 고문이었던 셈이다.
  옥사 뒤쪽으로는 나병이나 전염병 환자들을 격리수용하던 나병사와 갇혀 있던 사람들이 단체 목욕을 하던 야외목욕탕, 빨래터 등이 있었다. 그 빨래터에는 아직도 물이 남아있어 당시 빨래터의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평화의 상징이라고 비유되는 비둘기 몇 마리가 날아와 앉아있었다.

  “순국선열유족회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나요?”
  “조상들 중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사람들의 후손들이 모임을 갖다가 유족회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어. 할아버님 덕분에 유족이 된 거지. 그래서 그 분들의 민족정기를 이어받아 바로 세워야겠다라는 목적아래 힘은 없지만 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해서 조직한 것이야. 순국이라는 월간지 발간도 하게 된 것이고” 이종갑 회장에게 순국선열유족회의 조직과정을 듣다 보니 어느새 추모비 앞에까지 와 있었다.
  추모비 앞에는 고등학생인 듯한 몇 명의 남학생이 서 있었다. 그들은 추모비에 써있던 이름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다가 ‘여기 이인영도 있다’라는 말을 했다.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모양이다. 괜히 그의 손자와 함께 있던 기자는 우쭐한 생각이 들었으나, 동시에 어린 학생들이 이인영 의병장도 아닌 그냥 이인영이라고 말했음을 인식했다. 누군가 자기의 할아버지 이름을 아무런 존칭 없이 부른다면 어떨까? 그 순간 이종갑 회장을 쳐다보았으나, 못 들었는지 아무 말 없이 그는 “여기 우리 할아버지도 있네”라며 ‘이인영’이라는 이름을 손으로 가리키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다다른 곳은 사형장. 끊임없이 서대문 형무소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던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기에 오면 의분에 찬감이 항상 들어. 할아버님뿐만 아니라 같이 싸우다가 여기에서 처형된 동지나 부하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단지 기자 개인의 느낌이었을까? 사형장은 을씨년스러웠다. “이곳에서 우리 할아버님이 돌아가신 거야” 이 회장은 교수형에 쓰이던 긴 밧줄이 내려와 있는 사형장 안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만 나가지’라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독립운동 중심지로써 교육의 장
  서대문형무소를 한 바퀴 둘러본 후 그는 사형장 뒤쪽으로 높이 세워져 있는 아파트를 가리켰다. “이곳은 독립운동의 중심지로써 민족의 성지가 되어야 해” 감옥이 독립운동의 중심지라고? 그의 논리는 이러했다. 일제시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던 수많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붙잡히면 이곳 서대문형무소(당시 경성감옥)로 왔다. 그러나 그들은 심한 고문을 당해 옥사를 하거나 사형을 당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운동의 중심지라고 서슴없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아파트가 있는 저 곳도 사실은 형무소 자리였거든. 그런데 해방 후 불허를 받거나 해서 개인소유가 되어 버렸지. 이곳이 지리적 여건 등이 편리하니까 주민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려고 집을 지은 거야” 그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이런 곳은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하는데.” “역사관 개관이후에 유치원생을 비롯해서 많은 학생들이 관람을 온다고 하던데요?” “바람직한 현상이야. 젊은 학생들이 많이 와서 보고 가야해. 우리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지” 취재를 마친 후 그에게 동행해 준 데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기자는 한 바퀴 더 돌아볼 생각으로 형무소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때 현직 교도관 한 명이 “유관순 굴이라고 들어봤어?”라며 다가왔다. “아니요” 그는 역사전시관 왼쪽에 자리 잡고 있는 지하옥사를 가리키며, “92년 공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인데, 이 아래에 전시관과 지하옥사를 연결해 주는 통로가 있어”라며 전시관 지하로 내려 와보라고 했다.
  “고문실에서 전기 고문이나 바늘 끝으로 손톱아래 찌르기 등의 갖은 고문을 다 당한 후 이 지하 굴을 통해 감옥으로 이동을 한 것이야” 굴은 깜깜했으며, 높이는 허리를 구부려야만 이동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굴 이외에 또 다른 어둠이 있었다. 먹방이라는 곳인데, 햇빛 하나 들지 않고,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옥으로 이곳에서는 아무리 크게 독립만세를 외쳐도 밖에서는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남아있는 과제
  설명을 들은 후 그와 함께 형무소 내를 걸었다. 잔디가 자라고 있었고, 바닥에는 빨간 벽돌이 깔려 있었다. “이 벽돌도 잘 밟아야 돼. 독립투사들의 혼이 담긴 것이야. 독립투사들이 구워서 만든 벽돌이거든.”
  그리고 제 9옥사를 가리키며 “여기가 김대중 대통령이 옥살이 한 건물이네”라고 넌지시 말을 꺼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양심수시절 지냈던 바로 그 건물 말이다.
  긴 시간의 취재를 마치고, 형무소 밖으로 나왔다. 마지막 교도관이 던진 “여기가 김대중 대통령이 옥살이 한 건물이야”라는 말이 귓가에 맴돈다.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08년부터 45년까지의 역사를 복원한 것처럼, 역시 암울했던 시절에 민주화를 위해 애썼던 사람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45년 이후 87년까지의 역사도 복원해야 될 것이라는 과제를 던져 준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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