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절은 묻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그때는 과연 ‘아름다운 시절’이었을까? 기억의 힘은 우리를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어떤 삶도 과거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그 과거라는 것은 결국, 우리들 현재의 삶이 켜켜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의 풍화작용 앞에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엉킨 삶을 살아가게 된다.
  195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아름다운 시절’에서 이광모 감독은 보기 드문 작가주의 열정으로 상업적 감각의 침투를 철저히 차단한 채, 작은 시골 마을 사람들의 삶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 속에는 우리 모두의 상처가 담겨져 있다. 우리에게 직접적 연관이 없다고 해도, 그것은 현대사의 질곡을 거쳐 온 한국인들의 집단무의식에 원형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상처이기 때문에 누구나 깊은 울림과 반향을 받게 된다.

  미군 부대에서 일하면서 물자를 빼돌렸다가 쫓겨나는 아버지, 아이를 임신하고 미군에게서 버림받는 누나(성민이네),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생사를 모르는 아버지, 잃어버린 빨래를 변상하는 대신 미군과 정사를 갖는 어머니(창희네). 이 두 가정을 축으로 영화는 전개되지만 그들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며 누나이다. 감독은 관객들의 감정 이입을 유도하기보다는 그 시절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롱 쇼트와 롱 테이크로 영화를 끌고 간다. ‘아름다운 시절’의 완고한 작가주의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감정의 찌꺼기가 묻어나지 않는 쇼트, 프레임 안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냉정한 시선은 관객이 주체가 되어 능동적 사고를 가능하게 만든다.
  미군과 한국 여자들의 정사가 이루어지는 낡은 방앗간, 그곳은 타락한 세상의 축소판이다.
  아이들이 몰래 바라보는 흙벽의 구멍이야말로 아직 오염되지 않은 순수 상태의 관객을 영화 속으로 끌고 가는 원초적 힘이다. 아이들이 구멍의 틈새를 통해 방앗간 속에서 일어나는 세계의 더러움을 목격하듯이, 관객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이 세계의 추악함을 영화라는 구멍을 통해 들여다본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이미 세상의 비극적 본질을 목격해버린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뛰어들어 같이 혼탁해지던가, 감싸 안고 정화하든가, 혹은 버리고 떠나는 것뿐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름다운 시절’은 그렇게 묻고 있다. 다만 지나간 기억으로서 우리의 현대사를 되돌려 놓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영화는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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