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삶의 거울이다”

  역사는 인간의 삶을 바라다보게 하는 거울이다. 역사가 거울이라 할지라도 그 거울을 항상 맑게 닦아놓고 있지 않으면 뿌연 그림만을 보게 된다. 그 뿌연 그림으로는 역사의 참모습을 헤아릴 수 없다. 인류의 역사나 민족의 역사도 언제나 과거에서 미래로 향진하는 이정표가 되어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가에 그 역사의 의미가 달라지게 된다.
  현재는 역사성의 핵이다. 그런데 보통 현재는 과거에서 미래로 지나치는 미미한 극점이라고 생각하면 현재의 삶이 무의미하게 된다. 언제나 현재는 있는 것이다. 어디에 있는가하면 과거에서 미래로 지향하는 황금교량이다. 이 황금교량이 부식하거나 낡아 있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현재의 황금교량이 무너지지 않는 불괴교량으로 생가하고 일상적인 관념으로 왕래하고만 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현재의 교량도 성주괴공의 법칙에서 역사의 현재로서 존재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금교량인 현재 교량을 초점으로 하여 과거의 시간대와 미래의 무량겁을 가늠할 줄 알아야 한다.

  대학의 역사도 이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대학은 지성의 산실임과 동시에 지성을 양심과 대칭하는 학문을 추구하는 곳이다. 지성은 지고한 양심을 기저로 하여 자유ㆍ평등ㆍ자존을 구가하려는 낭만도 함께 갖고 있으므로 대학의 역사는 참으로 민족문화, 아니 세계의식을 현현하는 보루가 아닐 수 없다. 흔히 대학은 인재 양성이라는 미명하에 교육하고 교육받는 곳으로만 점지될 수 있지만 대학의 합목적성은 고도의 자유문화를 구가하는 인성을 장양하는 도량인 것이다.
  우리 동국대학교가 불교적 입장에서 1906년 개교한 것은 보다 큰 깨침을 대학인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에 훈습시키려는 원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각적 자비ㆍ평등을 이상으로 하여 왔기에 대학의 웅지도 광대한 것이다. 벌써 9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9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너무나 어렵다. 왜냐하면 대학의 황금교량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리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강둑이 어느 쪽으로 쌓여있는지. 새로운 지적도를 만드는 것보다 고지도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 고지도를 처음부터 그려놓은 것이 없다면 감감할 것이다.
  역사는 기록하여야 한다. 남겨 보관하여야 한다. 우리는 기록과 보관에 소홀한 지성인이다. 기록이 과거로 보면 보관은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다. 기록과 보관을 놓고서 새롭게 보는 분석의 현미경이 있어야 한다. 이 현미경이 현재의 교량이다.
  우리들 편찬위원들이 쇠비하고 희소한 기록과 보관 속에서 오늘의 현미경에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온갖 애간장을 태운 것은 바로 동국을 사랑하고 지켜가야 하는 신앙이 앞섰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고 자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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