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의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해 이제 막 빛이 보이려는 찰나, 우리는 건국 이래 최대의 경제 위기라는 또 다른 터널 속으로 길고도 지루한 여행을 시작하고 있다. 이와 맞물려 세기말이라는 강박관념은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는 꿈의 사형선고처럼 들려오는 요즘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아직 꿈을 노래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시인이 있어 관심을 끈다.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부드러운 감옥’이 입선. 시단에 데뷔한 이경임의 첫 시집 ‘부드러운 감옥’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직 꿈은 건재하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알전구 하나 켜지지 않은/ 세기말의 지루한 터널 속을/ 나는 터벅터벅 걸어간다(-‘숨쉬는 어둠’) 이경임의 현실에 대한 인식은 얼핏 보기에 비극적이다.
  그녀에게 있어 현실은 ‘세기말의 지루한 터널 속’처럼 어둡고 음침한 곳이다. 이러한 발견은 구약성서의 요나서에 나오는 니느웨를 현실로 재생시킨다.

  슬픔으로 둥글게 솟아오른 내 등 위로/ 니느웨의 불빛들이 쏟아진다(-‘니느웨를 걷는 낙타’) 그녀에게 있어 현실은 환락과 타락의 도시로 표상되는 니느웨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나’는 낙타처럼 쓸쓸하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쓸쓸함은 긍정적이다. 왜냐하면 쓸쓸함이야말로 그녀를 꿈꾸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그녀의 시에서는 씨앗을 심고 꽃이 피어오르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씨앗들도 꽃을 피우기 위해선 감옥살이를 한다. 참, 뭉클하다(-‘나팔을 연주하는 감옥’) 이른 아침 커다란 나팔을 불어대는 나팔꽃도 짧은 아침의 영광을 위해선 길고도 외로운 침묵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경임의 시에서 어둠, 터널 등의 이미지는 외부 세계와의 차단이라는 점에서 감옥의 이미지와 연결되는데, 감옥은 단편적인 이미지가 아닌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감옥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따뜻하다. 어둠, 터널로 인식된 세계의 냉랭함과는 달리 꿈의 ‘둥지’(-‘부드러운 감옥’)와도 같은 그녀의 감옥은 격리가 아닌 ‘꿈의 배양소’로의 감옥이다.

  너는 날마다 키가 크는 감옥이야/ …/ 생각의 뿌리를 깊이 내리면/ …/ 넌 어디에나 갈 수 있을 거야(-‘동화가 있는 풍경’) 동화의 형식을 띄고 있는 이 시는 감옥에 대한 이경임의 사상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키가 크는 감옥’에 이르러 시인은 세상으로부터의 격리가 타의가 아닌 자의였음을 암시한다. 타락한 외부 세계와 동떨어진 곳에서 시인은 ‘감옥 안에서의 자유’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꿈꿀 수 없을 만큼 타락한 세계를 벗어나 시인은 자신만의 감옥에 깊이 생각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는 자칫 시인의 단순한 도피로 의심될 여지가 크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인은 삶에의 의지를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오, 깃털처럼 가벼운/ 죽음에 매달려/ 다시 지상으로 탯줄을 묻는/ 삶, 무거운 꽃(-‘민들레’) 시인에게 죽음(어둠, 감옥, 잠듦과 꿈꾸는 행위)은 깃털처럼 가볍다. 하지만 그 가벼움은 무거운 삶에 다시 탯줄을 묻는 약속을 전제로 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시인에게 삶과 죽음은 하나의 ‘전체’일 때 진정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는 다시 삶을 꿈꾸는 곳으로 뻗어나가 있다. 시인 이경임은 타락 속에서 생명력의 발견, 이와 함께 꿈꾸는 희망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리모컨 누르는 여자’, ‘비누 여자’, ‘늙은 창녀를 위하여’, ‘고드름 속의 여자’ 등 시집 전체에 걸쳐 강조되는 여성의 이미지는 각박한 세상에 남성보다 여성의 고통이 더욱 크다는 점에서 분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