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회 동대학술상 인문과학부문 본상 가작]-신정욱(철학3)

 

요약문

기존의 음악미학의 논의들은 음악작품과 화자의 정서간의 문제에 대하여, 형식주의와 표현주의의 틀 안에서 설명해왔다. 최근 영미의 분석철학 전통을 이어받은 음악미학자들은 기존의 이론적 틀에다, 심리철학의 정서론을 혼합해 위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한다. 음악작품과 화자의 정서간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본 논문이 제안하고자 하는 이론은 J. 프린츠의 체현된 평가 이론이다. 이 이론은 정서의 현상적이고 질적인 부분을 잘 설명하면서도, 지향성의 문제와 공통감의 문제를 해명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그러나 프린츠가 음악의 정서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점이 없기에, 이 이론은 우리에게 이러저러한 정서를 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음악의 그 특성 속성이 무엇인지를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필자는 음악의 그러한 속성이 유기체의 안녕(Well-Being)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청각적 요소와 시·공간성임을 주장하려한다.

본 논문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Ⅱ장은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내용에 대한 일종의 예비적 과정이다. 이 장에서는 프린츠가 속해있는 비인지주의 계열의 이론들의 장단점과 표현주의 및 형식주의의 장단점을 살핀다. Ⅲ장에서는 프린츠의 이론의 이론적 기반이 되는 윌리엄 제임스의 이론을 간략히 제시한 후에, 프린츠 이론의 핵심을 그가 표방하는 특정 명제를 통해 살펴보고 그 명제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할 것이다. 또한 Ⅳ장은 청자의 정서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되는 음악작품의 특정 속성과 해당 정서와의 관계를 고찰할 것이다. 이를 위해 드레츠키와 프린츠의 이론을 비교분석하며, 프린츠 이론의 독자적인 측면을 비환원적 수반개념을 통해 설명하려 한다. 이후 Ⅴ장과 Ⅵ장에서는 청자의 정서에 영향을 미치는 음악작품의 특정 속성 자체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주요어] 프린츠, 드레츠키, 음악의 정서, 감각질, 핵심관련주제, 음악의 시·공간성, 표상,

 


▲신정욱(철학3)
우리가 음악을 듣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악이 우리에게 좋은 감정을 주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음악이 우리에게 좋은 감정을 주는지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쉽사리 대답하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우리의 일상적인 음악경험과 밀접하게 닿아있으면서도 보다 복잡한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논의의 편의상 이 질문을 조금 더 다듬어 보면, “음악작품과 청자의 정서사이의 관계 문제” 라는 말로써 개념화할 수 있다. 실제로 오랫동안 수많은 음악가와 철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고민했고, 저마다의 이론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문제가 논란이 되는 까닭은 이것이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아주 어려운 철학적 문제를 그 근저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ㄱ) 정서(emotion)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가?
(ㄴ) 음악의 자체의 어떠한 속성이 우리 정서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첫 번째 문제는 청자 즉 주관의 정서구조에 대한 것이다. 현대의 심리철학자들은 정서의 형성과정을 믿음과 판단과의 관계를 통해 해명해왔다. 어떤 철학자들은 정서가 믿음이나 판단을 통해 형성된다고 주장하였고, 이와 반면에 정서는 그러한 인지적 요소들과는 무관하게 느낌(feeling), 기분(mood), 신체적 변화 등을 통해 형성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도 있다. 분석철학 전통의 정서론에서 흔히 전자를 인지주의, 후자를 비인지주의라고 부른다.

두 번째 문제는 음악작품 즉 대상의 구조와 속성에 대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음악가 및 음악이론가들은 우리의 정서 영향을 주는 음악의 특성을 표현주의와 형식주의라는 이론적 틀을 통해 설명하려고 했다. 표현주의란 음악작품 속에 작곡가가 의도적으로 표현한 이념이나 감정이 존재하며, 이것이 청자의 정서에 영향을 준다는 입장이다. 반면 형식주의는 음악작품 속에는 그러한 내용적 요소(이념, 감정 등)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음악작품의 형식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음악의 정서문제와 관련한 19세기까지의 논의들은 두 번째 문제에 집중되었다. 이후 인간의 마음 내지는 심적 상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20세기 중반에서야 특히 영미권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비로소 음악의 정서문제는 형식주의-표현주의의 고전적인 틀과 더불어 청자의 정서구조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게 되었다. 최근까지 음악의 정서문제의 논의는 바로 이러한 틀 아래에서 진행되어왔다.

이상의 내용은 ‘음악의 정서문제’를 요리하기 위한 재료들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우리가 이 문제를 좀 더 명확하게 인식하고, 대답을 끝까지 강구하기 위해서, 재료들을 다듬어 일정한 틀로서 유형화하는 것을 제안한다. 주관(청자)의 정서론에서 인지주의와 비인지주의를 X축으로 하고, 대상(음악작품)의 속성문제에서 표현주의와 형식주의를 Y축으로 하는 일종의 직교좌표(orthogonal coordinate)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만나게 되는 이론들의 경우의 수는 다음과 같다. 먼저 인지주의와 표현주의가 결합한 이론을 언급할 수 있다.(A) 이는 우리가 음악작품의 내용(감정이나 이념)을 믿음·판단·평가를 통해 인지하며, 이 때 우리가 감동을 받는다는 입장이다. 이 이론은 역사상 가장 많은 철학자들이 취해왔던 노선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인지주의와 형식주의가 결합한 이론을 언급할 수 있다(B) 이는 우리가 음악작품의 형식을 믿음이나 판단 등을 통해 인지하고 이 때 감동을 받는다는 이론이다. 세 번째는 비인지주의와 표현주의가 결합한 이론이다.(C) 이는 어떠한 명제적 판단도 없이, 우리가 느낌(feeling)이나 기분(mood) 혹은 신체변화에 대한 지각을 통해 음악작품의 내용을 받아들인다는 입장이다. 네 번째는 비인지주의와 형식주의가 결합한 이론이다.(D) 이는 느낌이나 기분을 통해 음악의 형식을 파악하며, 이 때 우리가 음악적인 감동을 받는다는 입장이다. 마지막으로 제시할 것은 비인지주의와 표현주의, 형식주의가 결합한 이론이다.(E) 이는 음악작품이 청자에게 느낌, 기분, 신체변화에 대한 자각을 통해 일정한 주제를 표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비인지주의와 표현주의가 결합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음악작품의 내용은 작곡가가 의도한 감정이나 이념이 아니라, 그저 음들의 진행방식 즉 음악적 형식이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형식주의와도 결합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음악의 정서문제에 제기되는 질문을 분석해보았다. 다음은 그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답을 강구할 차례이다.

 

 

필자는 비인지주의와 표현주의 및 형식주의가 결합된 E 이론의 노선이 가장 설득력 있는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론은 필자가 새로운 음악적 정서론으로서 제안하는 것으로, 음악의 정서문제에 대한 기존의 논의에서 형식주의-표현주의의 단점을 최소화하려는 시도다. 이는 주관의 정서론을 중심적으로 놓고, 대상의 속성의 문제는 형식과 내용이 중심이 아닌 이 둘을 혼합한 형태로써 논해보려는 의도를 지닌다. 이를 위해, J. 프린츠의 이론을 음악작품과 청자의 정서문제에 적용할 것이다.

프린츠의 이론을 다루기전에, 이 장에서는 비인지주의와 표현주의, 형식주의의 전통이 어떠한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예비적으로 살펴보려한다. 비인지주의는 우선 개개인의 다양한 정서 경험들을 풍부하게 설명해 낼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마치 같은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의 맛이 사람들마다 모두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E 이론은 동일한 음악을 듣더라도 개인마다 모두 미세하게 다르게 느끼는 감동의 질적 차이를 풍부하게 설명할 수 있다. 비인지주의의 이러한 장점이 더욱 돋보이는 까닭은 우리 자신의 정서가 때때로 언어를 통해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느끼고 있는 바로 이 감정이 “슬픔”이라는 단어 하나로만 표현되기에는 충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슬픔이라는 단어 앞에 맥락상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이를테면 “황홀한”)를 붙여 비유적으로 표현하거나, 원관념을 보조관념을 통해 표현하는 ‘은유’를 통해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곤 한다. 이러한 점에서 명제나 판단 같은 인지적인 요소대신, 감각질(qualia) 내지는 세포나 유전자와 같은 생물학적 요소가 정서를 형성하는 근본적인 요소로 보는 비인지주의는 우리의 가려운 점을 적절하게 잘 긁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이러한 설명방식은 인지과학 내지는 생물학의 성과에 기댈 수 있다는 이론적 편리함 및 견고함을 갖춘다.

그러나 동시에 이 노선은 정서의 지향적 특징을 설명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일상적으로 우리의 정서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정서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이를테면 사랑의 감정은 내가 현재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며, 증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비인지주의는 주관적 현상의 질적인 측면과,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느끼는 공포와 같이 대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정서(기분mood)들을 설명하는데 효과적이지만, 지향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데 한계를 보인다. 또한 공통감(common sense)의 문제 역시 제기될 수 있다. 비인지주의의 틀 안에서 감정의 주관적인 차이는 쉽게 설명되지만, 공통감은 설명해내기가 힘들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이 그렇게 느끼는 감정이 우리 이외의 다른 사람을 통해서 검증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의 특성을 흔히들 감정의 사밀성(私密性)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감정의 이러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통감이 가능함을 반드시 설명해내야만 하는데,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느낀 정서에 대해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표현주의의 측면에서 이 노선은 음악에 대한 지각이 감정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음악이 청자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하는 환기론(arousal theory)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볼 수 있다. 형식주의의 전통이 음악의 독자성 내지는 자율성만을 강조함으로써 음악을 삶으로부터 유리시켰다는 비판을 받는 반면, 표현주의의 전통은 음악과 삶의 상호적인 관계를 중시한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표현주의는 치명적인 난점을 지니는데, 그것은 바로 순환논증의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환기론은 음악이 표현하는 것은 정서 E이며, 이것이 곧 청자의 정서반응인 e라고 주장하는데, 정서 e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다시 정서 E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또한 형식주의의 측면에서 이 노선은 음악의 질료적인 부분과 진행방식 및 형식적인 부분에 집중한다. 이런 점에서 음악 그 자체의 자율적인 형식을 강조한 형식주의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볼 수 있다. 형식주의는 음악의 독자성을 강조함으로써, 타 예술과 구분되는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을 확보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음악이 청자에게 감정적인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오직 음악의 형식에 대한 인지만을 강조함으로써 음악과 삶의 관계를 축소했다는 비판 역시 받고 있다.

다음 장에서는 E 노선의 이와 같은 장점을 좀 더 부각시키고 단점을 최소화하는 이론으로서 J. 프린츠의 정서론을 제시해 보겠다.

 


프린츠는 자신의 정서론이 제임스의 이론을 계승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따라서 프린츠의 이론을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그의 이론적 토대가 된 윌리엄 제임스의 이론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서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어떤 사실을 정신적으로 지각하면 정서라 불리는 정신적 감정이 일어나고 그러한 마음의 상태가 신체 표현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론은 이와 반대로 흥분을 일으키게 하는 사실을 지각하면 곧바로 신체 변화가 따르고 그 신체 변화에 대한 느낌이 정서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우리가 행운을 상실하면 슬퍼서 울고, 곰을 만나면 무서워서 도망치고, 경쟁자로부터 모욕당하면 분노하게 되어 때린다고 말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가설은 사건 계열의 이런 순서가 잘못된 것이고 한 정신 상태(정서)가 다른 정신 상태(지각)에 의하여 직접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 표출이 이 두 정신 상태 사이에 삽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다 합리적 진술은 우리가 울었기 때문에 슬픔을 느끼고, 우리가 때렸기 때문에 분노하게 되고, 우리가 몸을 떨었기 때문에 무서워진다는 것이며 이들 각 경우 슬프거나 분노하거나 무섭기 때문에 울고 때리고 몸을 떠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각은 있어도 신체 변화 상태가 따르지 않으면 그 지각은 순전히 인지적인 것으로 머물러 창백하고 색채 없고 정서적 온기가 결핍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곰을 보고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하고 또 모욕당하면 때리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기지만 우리는 실제 무서움이나 분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제임스의 이론은 정서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을 뒤엎는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슬프기 때문에 울고, 화나기 때문에 얼굴이 빨개지고, 기쁘기 때문에 웃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임스에 의하면 우리는 슬프기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울고 있기 때문에 슬픈 것이다. 그는 우리가 감정 혹은 정서라고 칭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내적인 신체적 느낌에 대한 자각이라고 주장한다. 프린츠는 이러한 제임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ㄱ) 감정적으로 의미있는 대상이 있다.
(ㄴ) 주관이 그 대상을 지각한다
(ㄷ) 주관에게 신체 변화가 일어난다.

프린츠는 이러한 제임스의 이론을 신체적 느낌 이론(the somatic feeling theory)라고 부르며, 이 이론의 기본적인 생각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체적 느낌 이론만으로는 정서 일반에 대하여 폭 넓은 설명을 기대하기 힘든데, 그 이유는 정서의 지향성 문제를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제임스가 말하는 감정 즉 신체적 변화에 대한 자각은 명제적 판단이 배제된 순수한 느낌에 가깝다. 분명한 것은 이 느낌 역시 어떤 내용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무도 없는 산 정상에서 일출을 바라볼 때의 감정, 퇴근 후에 지하철의 창에 비친 한강 풍경을 바라볼 때의 감정, 군대에서 막 제대한 후 부대 정문을 통과할 때의 감정. 이 모든 감정들이 우리에게 느껴지는 방식은 저 마다 다르다. 비록 언어로 표현해낼 수는 없지만, 각각의 감정들은 다른 감정들과 구분된다는 점에서, 이것들은 저마다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감정이 정확하게 어떤 대상을 지향하는지, 다시 말해 무엇에 대한 내용을 갖는지는 신체적 느낌 이론 안에서는 설명될 수 없다. 정리를 하자면 제임스의 정서론은 지향성의 문제가 본질적이지 않음을 역설하거나, 지향성의 문제를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다. 또한 공통감의 문제가 지적될 수 있다. 필자는 공통감의 문제와 관련해서 결국 신체적 느낌 이론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우리가 동일한 인식-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인식주체는 특정 사건이나 상황 혹은 대상을 지각했을 때, 비슷한 신체반응을 보이게끔 프로그램화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는 왜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변을 내리고 있지 않다. 이 문제들은 그동안 제임스 이론의 난점으로 지적되어온 것이다. 이렇듯 제임스는 감정의 질적이고 현상적인 측면에 주목하였고, 이를 신체적 감각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강한 비인지주의자로 구분되어왔다.

프린츠는 이러한 제임스의 이론을 자신의 ‘체현된 평가 이론(the embodied appraisal theory)’을 통해 보완한다. 본 논문에서는 체현된 평가 이론이 표방하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통해 프린츠 이론을 분석하도록 시도하겠다.

정서는 그것이 핵심관련 주제(core relational theme)를 표상한다(represent)는 점에서 평가이며 이러한 표상 즉 평가는 신체적 변화를 지각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체현된(embodied) 것이다.

이 구절을 천천히 살펴보자. 처음으로 살펴볼 것은 핵심관련 주제(Core rational theme)라는 용어다. 프린츠는 이 용어를 라자루스(R. S. Lazarus)에서 차용하였으며, 이를 ‘공통 주제(Common theme)'이라는 말로도 표현한다. 공통 주제란 특정 정서를 일으키는 다양한 사건 혹은 대상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부모의 이혼, 연인과의 이별, 키우던 강아지의 죽음, 파산, F학점, 직장에서의 해고 등은 모두 우리가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게되는 상황인데, 이러한 개별 상황들은 모두 가치 있는 어떤 것의 상실과 관련된다. 이 때 상실이 바로 슬픔이라는 정서의 공통주제이다.

정서가 곧 평가(appraisal)라는 말은, 평가에 대한 프린츠 자신의 정의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프린츠는 평가를 “유기체가 자신의 관심 또는 안녕과 관계하는 어떤 것을 표상하는 것(Emotions necessarily comprise representations of organism-environment relations with respect to well-being)” 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믿음․판단의 과정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인지주의자들이 말하는 평가적 판단과는 다른 개념이다. 그렇다면, 핵심관련주제를 표상하는 것이 어떻게 평가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질문이 가능하다. 이는 앞서 언급한 슬픔의 경우를 다시 떠올려보면 된다. 상실이라는 핵심관련주제는 결국 특정한 외부 상황(연인과의 이별, 키우던 강아지의 죽음 등)에 처해있는 주관이 자신의 이해관계나 관심과 관련해서 형성한 의미이다. 이는 결국 유기체가 자신의 관심 또는 안녕과 관계하는 어떤 것을 표상한다는 평가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살펴볼 것은, “감정이 신체적 변화들을 지각함으로써 핵심관련주제를 표상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감정이~표상한다.”라는 말에 주목한 것으로. 이 문맥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감정에 대한 프린츠의 언급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린츠는 심적 표상(mental representation)은 어떤 것을 표상하는 심적 상태(mental state)이며, 감정은 바로 이러한 심적 상태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떻게 심적 상태들이 어떤 것을 표상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는 드레츠키의 표상적 의식이론의 도움을 받아 이를 해명한다. 일반적으로 ‘표상하다.’ 라는 술어는, 믿음 등의 명제태도의 측면에서만 설명되어왔다. 다시 말해, 인식 주체가 외부의 정보를 믿음․판단의 형태로 표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드레츠키는 현상적 의식을 포함한 모든 심리적 사실이 곧 표상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지향성(intentionality)의 자연화를 검토한 후, 그 다음 현상적 의식을 지향성으로 환원하여 마침내 마음 전반의 자연화를 시도하였던 그의 철학체계 전반과 맥락이 닿아있다. 드레츠키는, 표상은 반드시 명제적 내용을 담보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다음의 조건들을 충족하는 경우에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1. 어떤 사태나 사건, 혹은 속성의 예화(A)가 일어날 때마다, 언제나 다른 사태나 사건, 속성의 예화가 일어나는 경우(변칙적 공변관계), 이때 A는 B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2. (유기체의 경우) 환경의 변화에 대한 정보는 유기체의 생존과 종의 유지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며, 진화의 과정동안 두뇌(B)는 그 해당 유기체가 환경의 변화(A)에 매우 면밀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활동하는 기능을 획득하였다. 이 때 두뇌의 활동은 환경적 조건(사건이나 특정 속성의 예화)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곧 표상(representation)이다.


이것이 드레츠키가 제시하는 표상(representation)의 정의다. 이에 따르면, 자연선택의 과정에서 두뇌가 주변 환경의 정보를 신체에 전달하는 것을 통해 위의 1의 조건을 충족했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신경생리학적인 신호들은 사실상 모두 표상의 작용이 된다. 그러므로 “감정이 ~ 표상한다.” 는 주장은, “심적 상태가 ~을 표상한다.”는 주장으로 치환되고, 이 주장은 다시 “두뇌가 ~한 정보를 전달한다.”는 말로 최종적으로 치환되어 이해할 수 있다. 요약해보자면, 표상적 의식이론에서는 모든 심적 상태에 대한 두뇌의 활동이 표상작용이며, 대상의 속성 즉 대상에 대한 정보가 표상내용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신체적 변화들을 지각함으로써 핵심관련주제를 표상한다는 말”에 주목한 것으로 이는 진화론과 생물학의 도움으로 설명가능하다. 프린츠는 위의 상황이 진화과정을 통해 외부 사건에 대한 지각과 그에 상응하는 특정한 신체적 변화 간에 인과적 연결고리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어두운 밤 홀로 골목길을 걷고 있을 때 무언가가 갑자기 달려드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 같은 상황에선 누구나 할 것 없이 깜짝 놀랄 것이다. 프린츠의 관점에서 이 놀람에는 이를테면 동공의 확대, 심장박동 및 호흡수의 증가, 오한과 같은 여러 신체변화들이 선행한다. 이러한 신체변화들은 위험상황에 마주했을 때 무조건반사적으로 일어나는데, 실은 심장박동의 증가가 근육의 운동에 필요한 혈액의 흐름을 증가시켜 주체로 하여금 위험상황으로부터 도망가거나 싸우는 등의 다음 행동을 준비시키는 기능을 하는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유기체가 진화 곧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의 과정에서 종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자연스럽게 학습한 특질이다.

필자는 앞서 윌리엄 제임스의 이론이 지향성과 공통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드레츠키의 표상적 의식이론과 진화론을 수용한 체현된 평가이론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들이 말끔히 해소된다. 먼저 지향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드레츠키의 설명대로 모든 심적 상태가 어떤 것을 표상한다면, 그 표상은 지향하는 대상과 그에 대한 내용을 가진다. 왜냐하면 드레츠키의 정의에 따르면 표상이란 근본적으로 어떤 것(유기체의 경우는 주변 환경)에 대한 정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공통감의 문제와 관련해서, 체현된 평가 이론은 신체적 느낌 이론 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는 대답을 내놓는다. 저마다 다른 개별적 상황들이 서로 다른 주체에게 같은 핵심관련주제를 표상한다면, 사람들이 감정의 내용, 즉 질적측면에서 약간의 개인차는 있을지언정 큰 틀에서 하나의 감정 군(群)안에 묶이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공통감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이론적인 단서이다.

이상의 논의는 프린츠의 이론의 핵심을 기술한 것이다. 아마 위와 같은 설명을 듣고선, 혹자는 “어떤 감정은 외부 대상에 대한 지각이 매개가 되어 발생하지만, 몇몇 감정들의 경우 그러한 감각경험 없이도 명제화된 기억이나 회상 등을 통해 발생한다.”는 반론을 제기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다(M)”는 문장을 떠올림으로써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샘솟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프린츠는 ‘연합 학습(associative learning)이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해명한다. 프린츠의 관점에 의하면 위 사례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회상(M)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최초의 지각과 연합된 것이다. 즉, 어머니의 임종 모습과 입관의 상황에 대한 지각은 상실이라는 핵심관련주제를 표상함과 동시에 슬픔의 감정을 느끼게 하고, 이 감정은 “사랑하는 어머니가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MN)”라는 명제화된 생각과 연합한다. 그리고 이후에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그 기억은 MN과 연합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감각경험과 상관없이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프린츠는 명제적 판단 역시 정서의 원인이 될 수 있지만. 이는 이전의 지각과 연합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정서 발생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며, 다만 지각에 기생(parasitic)해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논의를 정리해보도록 하자. 마치 모든 건축물에는 반드시 그것의 골격이 되는 철근구조가 있듯이, 모든 정서에는 그것의 골격이 되는 체현된 정서(embodied)가 있다. 이러한 체현된 정서를 바탕으로 여러 명제화된 생각들이 연합하며, 이를 통해 현재 우리가 느끼는 복잡다양하면서도 미묘한 구체적인 정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제부터 프린츠의 체현된 평가이론을 음악적 정서경험에다 적용하는 실험을 단행하려한다.(EP) 앞서 언급한 체현된 평가이론의 도식은 다음과 같다.

“외부의 자극(음악작품) → 신체의 변화 → 신체변화에 대한 자각 = 감정”

이 도식을 통해 우리는 EP의 결론 중 하나, 곧 음악작품이 우리의 정서반응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음악작품에 표현된 정서가 청자에게 그와 동일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하는 환기론(arousal theory)의 주장과 유사해보인다. 또한 환기론은 프린츠가 의존하는 드레츠키의 감각질 외재주의와도 외견상 닮아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환기론과 프린츠의 이론적 차이를 분명히 하고, 드레츠키와 프린츠와의 관계도 명확히 할 필요가 생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린츠는, 주관의 정서와 대상의 속성간의 인과관계는 인정할지언정, 정서가 대상의 속성과 동일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의 타당성은 EP의 실행에 앞서 먼저 음악작품의 대상의 속성과 청자의 정서와의 관계문제를 명료하게 분석하는 것을 통해서 보장될 수 있을 것이다.

프린츠가 수용하고 있는 드레츠키의 표상적 의식이론은 마음의 자연화라는 기획하에, 후기 이론인 감각질 외재주의(qualia externalism)로 발전하는데, 이 이론의 핵심은 감각질이란 경험 자체의 속하는 심적 상태의 특징이 아니라, 대상이 갖는 성질이라고 주장하는 데 있다. 그에 의하면 추운 겨울 따듯한 이부자리에 누웠을 때의 그 감촉을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환원 불가능한 현상적인 의식의 특징이라기보다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 속성을 단지 내가 표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즉, 우리 내부에는 두뇌에서 보내는 전기신호라는, 표상의 작용만이 있을 뿐 표상의 내용은 우리 외부에 있는 대상 그 자체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앞서 언급한 체현된 평가이론의 도식을 통해 이해해보자.

프린츠 이론에서 주체의 특정 정서는 적어도 두 가지 표상을 통해 형성된다. 먼저 정서는 신체변화를 야기한 대상의 내용을 표상한다. 두 번째로 정서는 신체변화의 내용을 표상한다. 그런데 프린츠는 이를 두 가지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상의 특정 속성이 곧 주관의 표상 내용과 동일하다는 드레츠키의 설명이 프린츠의 이론안에서 적용되는 방식을 명료하게 파악하기 힘들어진다. 그러므로 필자는 대상의 속성과 핵심관련주제, 그리고 정서 사이의 관계를 좀 더 명확히 분석함으로써 이 난점을 우회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필자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음악작품을 표상한다는 것은, 프린츠의 관점에서 두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음악작품에 대한 표상을 통해 우리의 신체가 반응하는 과정이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신체의 반응의 내용을 우리 자신이 표상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의 정서가 형성된다. 이 때 표상은 정보전달의 매개가 되는 그 작용과, 정보전달의 대상이 되는 그 내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과정에서 정보전달의 매개가 되는 표상의 작용은, 우리의 감각기관과 두뇌이다. 이 때 감각기관과 두뇌는 오로지 음악에 대한 감각정보만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의 배경이 되는 여러 상황들을 동시에 받아들인다. 이를 통해 음악작품과 그 지평은 두뇌에 의해 신경물질의 형태로 각각의 신체부위로 전달된다. 두 번째 과정에서 표상의 작용은 우리의 감정이 신체반응의 내용을 지각하는 것인데, 이는 역으로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개별반응들이 다시 두뇌로 전달되는 과정을 거친다.

첫 번째 과정에서 표상의 내용은 음악작품에 대한 특정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이 일단 두뇌에 접수되고, 이를 통해 각각의 신체로 전달되는 과정에서는 ‘핵심관련주제’가 그 내용이며, 표상이 작용은 신경물질으로 변환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지각의 과정에서 두뇌는 대상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자마자 해당 유기체의 안녕(well-being)에 유리한 방식으로 이해·변환하여 전달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과정에서의 표상의 내용 역시 핵심관련주제에 입각한 신경물질이다. 그러나 그 방향은 각각의 신체부위에서 다시 두뇌로 전달된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과정을 모두 거친 후에야, 우리는 최종적으로 특정한 정서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드레츠키의 설명대로라면 음악작품의 속성과 두뇌의 표상내용은 일치해야만 할 것이다. 이를테면 단정하고 아기자기하면서도 정교한 모차르트의 특정 곡 안에는 안정(stability)이라는 핵심관련주제가 속성으로 내재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두뇌가 그러한 핵심관련주제라는 정보를 실제로 우리 몸에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적용이 이론적 부담이 크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프린츠의 설명대로라면 유기체는 특정 대상 및 그 대상의 주변 환경과 자신과의 관계속에서 자신의 관심 또는 안녕과 관계하는 어떤 것, 즉 핵심관련주제를 표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기체의 외부에 핵심관련주제가 존재한다는 드레츠키의 주장은 프린츠의 이론으로 수용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그러나 비록 프린츠의 이론이 핵심관련주제가 대상 그 자체의 속성이라는 점은 거부하더라도, 대상의 어떠한 속성이 유기체가 표상할 핵심관련주제와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 따라서 필자는 전자와 후자는 서로 동일하진 않지만, 전자가 반드시 후자를 수반한다는 것을 통해 대상의 속성와 유기체의 핵심관련주제 사이의 인과관계를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이는 비환원적 수반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흔히 수반관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성을 통해 제시된다.

1) 의존(dependency) : 수반된 속성들은 그들의 토대가 되는 속성들에 의존하거나, 그것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2) 비환원성(non-reducibility) : 수반된 속성들은 토대가 되는 속성들에로 환원시킬 수 없다.
3) 공변(covarience) : 수반의 속성들은 그들의 기반이 되는 속성이나 토대가 되는 속성들과 함께 변화한다. 특히 토대가 되는 속성에서 구별되지 않음은 수반된 속성에서 구별되지 않음을 함축한다.

이러한 수반 개념을 음악작품 A, 그 지평 B와 핵심관련주제 C에 적용시켜 보면, 핵심관련주제 C는 1)음악작품 A와 그 지평 B에 의존하지만, 2)음악작품 A 혹은 그 지평 B로 환원되지 않는다. 또한 수반되는 속성인 핵심관련주제는 그 기반이 되는 음악 작품이나 그 지평둘 중 하나가 변화하게 되면 함께 변한다. 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 우리가 공포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에 대한 배경음악을 함께 듣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때의 음악작품 A는 “A : 조용하다가 특정 장면(scene) 직전에 갑자기 고조되는 음악”이라고 생각될 수 있고, 지평은 “B : 귀신이 나오는 장면”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핵심관련주제는 “C : 위험” 이라고 볼 수 있다. 비환원적 수반에 의하면, A와 B, C의 속성은 서로 다르지만, C는 A와 B에 수반하는 속성이다. C가 수반하는 양상은 다음 세 가지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첫째, C는 A와 B에 각각 의존하거나 그것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 두뇌가 위험이라는 핵심관련주제를 표상하는 것은 귀신이 나오는 장면과 조용하다가 특정 장면 직전에 갑자기 고조되는 음악 때문이다. 둘째, C는 A나 B로 환원되지 않는다. 즉, 위험이라는 핵심관련주제는, 조용하다가 특정 장면 직전에 갑자기 고조되는 음악과 귀신이 나오는 장면으로 각각 환원될 수 없다. 셋째, C는 A나 B가 변화하게 되면 함께 변한다. 만일 A가 A'(싸이의 강남스타일)로 변화하였거나 B가 B'(이명박 대통령의 연설장면)로 변화하였다고 가정해보자. 즉, 귀신이 나오는 장면에서의 배경음악이 갑자기 강남스타일로 바뀌는 경우 혹은 조용하다가 특정 장면(scene) 직전까지 갑자기 고조되는 음악은 흐르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연설하는 장면이 나오는 경우, 그리고 이 둘이 모두 변화하는 경우 우리는 더 이상 위험이라는 핵심관련주제를 표상하지 않는다.

이렇듯 비환원적 수반 개념으로 음악작품과 그 지평 그리고 핵심관련주제를 설명하게 되면, 드레츠키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했을 때처럼 음악작품의 속성을 핵심관련주제 혹은 대상의 정서와 일치시켜버리는 일을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음악작품과 핵심관련주제 각각의 영역을 담보하면서도 그 둘의 인과관계를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의 적용은 특히 위 사례에서 공변에 대한 적용과 관련하여 한 가지 난점을 지닌다. 그것은 음악작품 A와 그 지평 B가 변화하였는데도 핵심관련주제는 변하지 않을 경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A가 A'(여자의 비명소리가 삽입된 음악)이나, B가 B'(살인마가 나오는 장면)으로 바뀐 경우로 가정했을 경우 발생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음악작품의 속성을 자세히 밝힘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데, 다음 장에서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이를 통해 우리는 대상의 특정속성이 곧 정서나 핵심관련주제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의 질문은, “음악의 어떠한 속성이 우리의 두뇌에게 이러저러한 핵심관련주제를 결정하게 하는가?” 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음악작품의 특정 속성을 파악하는 몇 가지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먼저 특정 소리유형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지각 방식의 측면을 언급할 수 있다. 우리의 두뇌는 진화과정을 통해서 지나치게 큰 소리를 신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특질을 획득하였다. 또한 우리는 칠판을 긁는 듯한 소리나 유리가 깨지는 소리 등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특정한 신체반응들을 보이며, 화내는 어조와 부드러운 어조를 구분하여 후자가 자신에게 더 호감을 보인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파악한다. 이는 음악을 전혀 듣지 않는 사람 역시 수행하고 있는, 소리에 대한 우리의 지각처리방식과 관련된 것이다. 앞서 우리는 이러한 지각처리방식이 여타의 감각들과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안녕(Well-being)과 관련된 핵심관련주제를 표상하며, 진화과정을 통해 우리 신체가 자연스럽게 획득하였음을 밝힌 바 있다. 소리 역시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안녕(Well-being)에 영향을 주는 특정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요소들은 우리에게 특정한 신체변화를 야기한다. 분명한 것은 특정한 소리나 음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인 두뇌-신체 반응들은 음악작품에 대한 우리의 기초적인 인상을 구성한다는 사실이다. 곧 이러한 신체반응들은 우리가 음악에 대한 느끼는 정서의 방향 이를테면 쾌와 불쾌로 향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향을 주관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설명은 J. 라빈슨의 이론에서도 발견되는데, 그녀는 이를 ‘재저사이즈 효과(Jazzercise Effect)'라고 부른다. 라빈슨은 자신의 저서『Deeper than Reason』에서, 청자가 음악을 듣고 심오한 정서적 경험을 하는 이유는 음악이 “청자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청자에게 직접적인 생리적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이러한 재저사이즈 효과는 직접적이고 원초적이며 따라서 때때로 청자에게 오싹한 전율을 일으킨다. 청자는 자신에게 그토록 강렬하게 직접적으로 체험되는 음악의 효과가 단순한 신체적 변화라고는 결코 믿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작곡가 내지는 연주가의 천재성 혹은 신의 뜻, 삶의 의미 등 제3의 요소에 의존하여 자신의 감동을 설명하고자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진화과정에서 대상이 유기체의 관심(interest)에 주는 영향과 관련하여 신체적으로 반응하게끔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프린츠와 라빈슨의 입장이다.

이렇듯 소리 자체에 대한 신체의 기초적인 지각처리방식은, 음악작품에 대한 우리 정서의 방향을 결정한다. 하지만 우리의 음악경험은 너무도 다채롭기에, 이러한 재저사이즈 효과만으로는 음악 경험을 풍부하게 설명해내긴 힘들다. 따라서 신체의 반응과 직결된 음악적 정서 이외에도 어떠한 형태의 정서가 가능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프린츠 이론을 설명하면서 체현된 정서가 우리의 정서 일반의 골격이 되고, 이를 바탕으로 명제적 판단과 연합된 정서들이 형성된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음악에서의 정서 경험 역시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특정 음악을 들으면서 그 음악과 관련된 기억들이 동시에 떠오르는 경험들을 쉽게 하곤 하는데, 예를 들어 과거의 연인이 좋아했던 음악이라든지, 돌아가신 아버지의 애창곡을 들으면서 그 음악과 관련된 기억을 회상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는 음악이 우리에게 야기하는 신체적 반응들에 대한 표상 즉, 체현된 정서들이 명제적 판단과 연합된 형태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연합된 정서’ 는 기억 회상의 측면 뿐 아니라, 음악 형식에 대한 인지의 측면에서도 설명가능하다. 이는 잘 훈련된 음악가 혹은 음악이론가처럼 음악의 정형화된 형식 이를테면 ‘소나타 형식’, 'A minor Chord' 등 을 인지하는 경우와, 일반적인 사람들이 다만 음악적 ‘패턴’을 인식하는 경우로 세분될 수 있다. 여기에서 필자는 특히 후자와 관련해서, 사람들이 특정 음악작품 안에서 어떻게 특정 패턴을 읽어내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이 곡은 너무 뻔해”, “이 곡은 좋지만 금방 질려” 라는 평가를 듣는 경우가 많다. 이 때, 사람들이 말하는 평가의 의미는, 그 음악작품이 독창성이 없다는 말로도 이해될 수 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접근하자면 ‘음악의 형식과 내용이 다른 곡들과 닮아있으므로, 별로 신선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맥락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어떻게 음악적 형식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전무한 사람들이 이러한 평가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음악작품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특정한 형태의 인식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필자는 사람들이 음악의 진행방식을 실제 세계와의 유사성을 통해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주장하려한다. 이러한 인식은 “A는 B와 유사하다.”처럼 직접 관련되는 대상들과의 비교를 통해서도 구성할 수 있지만 좀 더 근원적인 형태의 유사성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실제 세계의 사건들의 시․공간적 패턴과의 유사성을 통해 음악 시․공간적 진행방식의 패턴을 파악하는 방식이다. 음들이 진행하는 방식은 음들이 생성-소멸을 거듭하는 음악의 시간적인 방식과 여러 음들이 동시에 서로 다른 높이에서 울리는 공간적인 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음악의 시간성과 공간성은 그것이 음악작품 내부에서 실행되는 방식에 따라 현실세계의 구체적인 사건들과 유사성을 보이며,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음악작품의 진행을 일정한 패턴으로 종합하여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실제 세계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느끼는 것들 역시 시간과 공간의 진행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먼저 시간적 진행에 대하여, 매우 배고팠을 때 먹는 식사 한 끼가, 배가 부를 때 먹는 진수성찬보다 맛있게 느껴지는 우리의 구체적인 경험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이 때의 느낌은 결국 (맛있다는) 현상적 느낌이, (굶주림이라는) 이전 상황의 느낌과 시간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시간변화에 따라 나쁜 사태가 좋은 사태로 변해간다는 인상을 구성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우리의 음악경험에서 그대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우리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들이 점차 귀에 익숙한 소리들로 변화하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것이 결국 나쁨에서 좋음으로 변화하는 일정한 패턴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경험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마찬가지로 부모의 곁을 떠나 방탕하게 생활하던 아들이 다시 부모의 곁으로 돌아오는 사건의 패턴, 즉 ‘순환’이라는 시간적 패턴을 곡의 서두에서 그 곡의 주제가 되는 주선율(Main melody)를 연주하다가, 즉흥연주(mprovisation)를 하고, 곡의 말미에서 다시 주선율(Main melody)을 연주하는 재즈의 음악적 형식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일상에서, 특정한 대상을 인식했을 때 그 대상이 어떠한 공간적인 위치를 가지는지를 자연스럽게 인지하는 것처럼, 음악작품 역시 마찬가지로 공간적으로 파악한다. 우리는 특정 소리를 들었을 때, 그 소리가 왼쪽 귀에 가깝게 들리는지, 오른쪽 귀에 가깝게 들렸는지를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동시에 울렸을 경우에 그 소리가 들리는 방향들을 어렴풋이나마 파악가능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하나의 소리-사건이 특정한 장소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지각할 수 있다. 그런데 위와 같은 공간적 청각경험의 방식은 실제로 홈 오디오 시스템 내지는 다양한 악기가 연주되는 대규모 연주회에서만 적용가능할 뿐, 우리의 풍부한 음악 경험을 설명하는데 있어, 뭔가 부족한 인상을 준다. 분명한 것은 음악 경험에 대한 공간적인 인식은 비단 여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악기라는 하나의 장소에서 각기 다른 높이(Pitch)의 여러 음들이 동시에 들렸을 때, 그 음들이 공간적으로 서로 다른 높이에서 들린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는 공간적 인식이라기보다 공간에 대한 은유의 지각에 가깝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식패턴이 음악적 경험에 있어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흔히 클럽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들은 대부분 곡의 절정에 이르기 직전에 마치 우리가 끊임없이 뻗어나가는 느낌들을 가져다주며(공간의 상승), 매우 우울한 음악들은 마치 우리 자신이 바닥으로 꺼져 들어가는 느낌들을 가져다주기도 한다.(공간의 하강) 이러한 인상들은 우리의 공간적 체험과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지만, 음악작품에 대한 정서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음악에서의 형식과 내용의 개념은 특히나 그 경계가 모호하다. 우선 내용이라는 용어 자체가 다의어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만약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이해한다면, 내용은 질료 혹은 재료의 측면을 뜻하게 되지만, 우리의 논의에서는 그 용어를 음악이 표현하는 바, 곧 감정이나 이념의 측면으로 사용되어왔다. 이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사실 형식과 내용(matter)의 외연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주의자들이 말하는 형식의 개념은, 정의상 내용(matter)와 내용(content) 모두의 반의어라고 할 수 있지만, 형식주의자들은 표현주의자들의 내용(content) 개념에는 예민해지는 대신, 내용(matter)의 개념에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듯하다. 이를테면 그들이 말하는 구호가 “음악 자체에 집중하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음악의 형식(form)에 집중하라”인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내용(Content)이라 함은, 특정 방식으로 구조화한 사물 혹은 체계를 이루는 요소․과정․성질의 총체를 의미하고, 형식(Form)은 이러한 내용 속에 존재하는 관계의 총체를 뜻한다. 예를 들어 칸트가 시간과 공간이 감성의 형식이라고 했을 때의 의미를 생각해보라. 칸트에게 시․공간이란 우리 외부에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이나, 사물들 간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모든 사유 활동에 있어, 그것이 이루어지는 배경과도 같은 것이다. 이는 마치 물을 담기 위해서 빈 그릇이 필요한 것과 같다. 모든 사유의 가장 밑바닥에는 대상을 우리 밖에 있는 것으로 또는 이것과 이것을 서로 다른 것으로 구분하는 기능을 하는 공간형식이 있고, 대상이 동시에 있거나, 잇따라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을 이해하는 기능을 하는 시간형식이 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시․공간은 순수 직관 형식인 것이다. 그러나 음악은 어떠한가? 우리가 흔히 음악적 형식이라고 들어온 것들, 이를테면 박자(meter), 화성(harmony), 혹은 푸가, 소나타와 같은 것들이 엄밀한 의미에서 형식일 수 있는가? 필자는 모든 음악적 형식은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음과 음간의 관계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즉 반드시 최소한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낳는다. 만약 표현주의자들이 중시하는 감정 혹은 이념으로서의 내용을 거부했을 때, 그들은 형식이라는 용어를 외연을 어디까지 볼 것인가? 예를 들어 음악의 운동성은 형식인가? 내용인가? 형식주의자들은 이 역시 음악적 형식이라고 주장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형식이기도 하고 내용이기도 할 뿐이다.

그렇다면 EP가 표현주의와 형식주의의 노선 중 정확하게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다시한번 정리해보도록 하자. 먼저 앞서 언급하였듯이 EP는 음악작품이라는 대상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환기론과 닿아있다. 그러나 음악작품 자체가 정서나 이념을 포함하고 있다는 환기론의 주장을 거부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후자를 거부했을 때의 EP는 정서란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주체의 심적 상태임을 강조함으로써, 환기론의 순환논증의 오류를 벗어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편으로 EP는 대상의 속성이란 정서나 이념이 아니라, 형식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형식주의와도 닿아있다. 그러나 대상과 주관과의 감정적 인과관계를 전혀 배제하는 고전적 형식주의와는 달리, EP는 대상이 주체의 감정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것을 긍정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를 통해, EP는 음악작품을 삶으로부터 분리시켰던 형식주의의 단점을 피해갈 수 있다.

이렇듯 EP는 기존의 표현주의-형식주의의 대립 구도를 벗어나 양쪽의 장점을 수용하면서도 난점들을 피해갈 수 있는 이론이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J. 프린츠의 체현된 평가이론을 바탕으로 음악에서의 청자의 정서 문제를 살펴보았다. 프린츠의 이론은 정서 일반에 대하여, 기존의 비인지주의 이론이 가진 장점을 살리면서도 지향성이나 공통감의 문제를 잘 해결해냈다는 점에서 장점을 지닌다. 특히나 예술작품 향유의 측면에서 보자면, 작품에 대한 주관의 미세한 감정적 차이가 그 예술을 지속적으로 향유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프린츠 이론은 느낌(feeling)이나 기분(mood)를 중시하는 비인지주의를 이론적 바탕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미적 경험에 대한 폭넓은 적용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프린츠의 이론을 음악작품에 대한 청자의 정서문제에 적용한 EP이론은, 표현주의와 형식주의의 장점을 취하면서도 그 이론들의 단점들을 피해갈 수 있다. 먼저 청자에 정서 e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대상의 속성을 정서 E가 아니라, 음악의 형식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표현주의자들의 순환논증의 오류를 비켜갈 수 있다. 또한 음악적 형식을 중요시하면서도, 음악과 청자의 정서 경험이 직접적으로 관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형식주의자들의 단점으로 지적된 음악과 삶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보장할 수 있게 된다.
프린츠 이론은 그 뼈대는 윌리엄 제임스의 신체적 느낌 이론에서, 살점은 드레츠키의 표상적 의식이론에서 빌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드레츠키의 이론은 감각질을 비롯한 느낌, 기분의 지향성 문제를 잘 해결해내는 실마리가 되는데, 한 가지 난점은 드레츠키의 감각질 외재주의를 프린츠의 이론 안에서 어떻게 해석할 지의 여부이다. 앞서 프린츠 이론과 드레츠키 이론의 차이점을 비교대조하는 과정에서 원문에 대한 정확하고 치밀한 해석보다는, 필자의 사견이 많이 개입된 것 같아 이 대목은 개인적으로 많이 아쉽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를 통해 더욱 더 보충하고자 한다.

또한 프린츠의 이론을 음악작품에 대한 청자의 정서경험에 적용시켰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아보았다.. 먼저 여타의 지각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두뇌는 음악작품에 대해 우리 자신의 안녕(Well-being)의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파악하곤, 이와 관련한 특정한 신체반응을 지시하며, 이러한 신체 반응을 표상하는 것이 곧 청자의 정서의 가장 근본적인 골격이 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또한 이것이 과거의 기억과 연합하거나, 실제세계와의 유사성을 통해 음악작품의 특정한 형식을 파악하는 특정한 명제적 판단들과 연합하여 화자의 정서를 복잡다양하게 형성한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앞으로는 프린츠의 이론이 타 학문 특히 인지과학이나 생물학과의 연계속에서 어떻게 음악의 정서경험을 잘 드러낼 수 있는지를 더 공부해보고 싶다. 그와 더불어, 마음의 자연화에 대한 드레츠키의 시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의 여부도 꾸준히 관심을 가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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