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회 동대학술상 인문과학부문 본상 장원] -고태진(사학4)

고대 백제의 對倭關係와 그 인식

▲고태진(사학4)

Ⅰ. 머 리 말

일찍이 百濟의 對倭關係와 관련된 연구는 구한말로부터 시작돼, 오늘날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초기 연구를 주도했던 民族主義 史學者들의 경우 이 문제와 관련해 백제의 문화적 우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그 연구범위를 선진문물의 전파양상에 국한하는 경향이 강했다. 물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일방적 역사인식에서 탈피하여, 양국 간 상호 이해관계를 직시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학계의 연구 성과와 별개로 한국인의 고대 한일관계사 인식은 과거 민족주의 역사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인식은 다분히 現在的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역사이해에 장해가 될 수밖에 없다.

이제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고대 백제의 대왜관계와 그 인식의 대강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첫 장에서는 백제의 대왜관계에 대한 현재적 인식을 살펴보겠는데, 여기에서는 근대이래 오늘날의 연구 성과를 검토하는 한편, 현행 국사교과서의 문제점을 짚어 보도록 한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백제인의 시각에 입각한 역사인식을 제안하겠으며, 특히 주의해야 할 문제로서 天下觀을 함께 다루도록 한다. 필자는 이러한 일련의 검토가 백제 대왜관계의 본질에 보다 다가가는데 유용할 것으로 보고, 궁극적으로는 고대 한일관계사의 바람직한 이해에 도움되리라 생각한다.

본고는 어디까지나 한국 측의 입장에서 주로 서술되었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뚜렷하다. 다만 평소 개인의 관념이나 인식과 같은 영역에 관심 가져온 필자가 여러 諸賢들의 역사인식을 이해하고, 나아가 백제인의 입장에서 고대 한일관계의 역사상을 추적해보았다는데 의의를 둔다.


Ⅱ. 백제의 對倭關係에 대한 현재적 인식

주지하다시피 근대이래로 百濟의 對倭關係와 관련된 諸問題는 韓․日 역사학계의 뜨거운 쟁점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연원은 대체로 20세기 초 구한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초기 이 문제를 주도했던 이들은 日本 官學派 史學者들과 韓國 民族主義 史學者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 이미 백제의 대왜관계를 바라보는 양자의 시각이 매우 판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사료해석으로부터 상이했으며, 연구목적에 이르러서는 거의 적대적이다시피 했다. 이를테면 전자는 󰡔日本書紀󰡕의 내용을 신뢰하여 당시 일본의 한반도 진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했고, 후자의 경우 󰡔일본서기󰡕를 불신하는 한편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해 궁극적으로는 民族性의 고양을 지향했던 것이다. 결국 양자는 각기 그들의 시대적 당면과제를 역사연구에 투영시켰던 것인데, 한국의 경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申采浩의 「讀史新論」이다.

[A-1] (일본은) 백제를 바라본즉 이는 높이 우러러 보이는 큰 나라인지라 감히 야심을 품어볼 여지가 없었으나 … (중략) … 일본의 頂踵毛髮이 다 백제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文字도 백제에서 수입하였으며, 美術도 백제에서 수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그 人種 자체도 수많은 백제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 (중략) … 만약 일본사에 나오는 것은 모조리 다 盲信한다면, 저들의 요즈음 붓끝은 갈수록 더욱 괴이해져서 檀君을 素箋明尊의 아우라고 하고 고려는 원래 일본의 속국이었다고 하는 등 魔談狐設이 마치 눈 내린 듯 분분한데도 저들의 말을 다 믿는다면, 우리나라의 4천 년 역사는 곧 日本史의 부속품이 되고 말 것이다. … (중략) … 내가 생각하기로는, 백제가 일본을 대우한 것은 비록 고구려가 말갈을 부린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일본이 백제를 우러러 바라본 것은 말갈이 고구려를 숭배한 것과 흡사하였을 것이다. … (중략) … 대개 저들이 문화․병법․商工 등의 技藝를 전부 백제로부터 배웠으므로 자연히 백제에 부림을 당하게 되었는바, 이와 같은 일은 고대 미개 野人들의 경우에서 흔히 있었던 예들이다. 申采浩, 「讀史新論」 上世 新羅․百濟와 日本의 關係

위의 [A-1]에서 보이듯 신채호는 백제의 대왜관계를 서술하는데 있어 당시 일본인의 역사인식을 부정하는 한편 시종일관 백제의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敎說的이다시피한 그의 주장에는 다소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없지 않다. 실제로 그는 당시 양국 간 교류를 백제에서 왜로의 일방적인 형태로 단정 지었으며, 특히 문화적 우위의 일면만으로 정치적 상하관계까지 도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민족주의 역사인식은 해방 이후 국내정세, 즉 일제청산을 지상과제로 삼았던 바로 그 시대적 분위기에서 많은 공감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민족주의 역사인식이 항상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바로 해방직후부터 이전의 역사 인식에 대한 회의와 자성의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과연 孫晉泰의 경우 新民族主義 歷史學을 제창하며 민족주의 역사인식의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고, 李丙燾 역시 震檀學會를 중심으로 實證主義 역사연구를 본격화했던 것이다.

이처럼 해방 이후 고대사(한일관계사 포함) 연구는 民族과 實證이라는 거대한 두 담론 속에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비교적 전반기는 과거 신채호 이래의 민족주의 역사인식이 우세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 백제의 대왜관계 연구를 다음의 [A-2, 3, 4]와 같이 평가하고 있다.

[A-2] 韓國史學界에서는 양국간의 문화적 교섭에 초점을 맞추어 주로 백제문화의 일본으로의 전파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즉, 여러 시기에 걸쳐서 백제로부터 일본에 건너간 각종 기술자를 포함한 인간집단들이 일본 국가 사회 내부에서 수행한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역할에 대해서 거의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 왔다.

[A-3]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고대 한일관계사는 연구사들의 관심 영역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그것은 고대 한일관계사의 사료적 보고인 󰡔일본서기󰡕에 대한 불신이 주요 요인이었다고 보인다. 다만 문화사적인 면에서 고대 한국 문화의 일본 전수라는 문화적 선진성을 과시하는 시각을 갖는 논고들이 60~70년대 주류를 이루었다.

[A-4] 그간 한․일 학계는 상호적인 관점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침략사관에 의한 역사해석과 일방적인 문화전수라는 주장만 되풀이하여 왔고 지금까지도 이와 같은 경직된 논의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90년대 초 冷戰體制의 종식에 따라 世界化의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급격히 변화해 갔다. 어느덧 민족주의에는 鎖國과 國粹의 성격이 크게 부각되었고, 사회적으로도 그것을 지양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 여파는 한국사 전반에도 크게 영향 미쳤던바, 그것은 고대 백제의 대왜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의 표는 90년 이후(이병도 제외) 백제의 대왜관계에 대한 諸學者들의 견해를 정리한 것이다.

金基興 :  왜는 백제의 문화적 혹은 경제적인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으리라 추정된다. 양자간에는 우호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고, 이에 따라 왜는 자신들이 쉽게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을 백제에 제공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는 비록 군사력을 일부 제공하였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나 문화적인 면에서는 백제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김기흥, 󰡔새롭게 쓴 한국고대사󰡕, 역사비평사, 1993, 294쪽.

金鉉銶 : 당시 백제는 일본에 필요한 선진문물을 제공하고, 일본은 백제에 필요한 군사원조를 제공하는 특수한 용병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 (중략) … 이제는 백제가 일본에 많은 선진문물을 전해주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막연하게 일본이 백제에 종속되었다는 생각을 갖기보다는 어떤 관계와 목적에서 백제가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해주었고, 왕녀와 왕족들이 도일했는지를 연구해야 할 때가 되었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창작과비평사, 2002, 31-32쪽.

盧重國 : ․ 중국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문화 수준을 높인 백제는 자신의 문화를 가야제국과 일본열도에도 전해주었다. … (중략) … 이처럼 백제에서 왜로 전해진 문물은 易學, 醫學, 藥學, 音樂 등 다방면에 걸쳤던 것이다. … (중략) … 이러한 과정을 거쳐 중국대륙과 한반도 및 일본열도는 하나의 共有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열도와 가야사회가 이 共有문화권에 동참하게 된 데는 백제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 (중략) … 미래의 동북아시아는 각국이 함께 번영하는 이른바 ‘共存과 共榮’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치적 대결이 아닌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화적 교류를 바탕으로 共有문화권을 만들기 위해 한국이 하여야 할 역할은 고대동북아에서 공유문화권을 형성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백제의 역사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노중국, 「백제학 연구의 현황과 전망」, 󰡔百濟學報󰡕 1, 百濟學會, 2010, 44-46쪽.

邊太燮 :  삼국문화의 일본전수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백제였다. 그것은 백제가 삼국 가운데 가장 일본과 지리적․정치적으로 연결되어 친선관계가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 … (중략) … 백제는 유교․불교를 비롯하여 의약․천문지리․음양오행 및 공예미술 등 여러 가지 학문과 기술을 일본에 전하여 飛鳥文化형성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邊太燮, 󰡔韓國史通論󰡕, 三英社, 1996, 114-115쪽.

申瀅植 : ․ 백제사에서 대왜(일본)관계는 고구려나 신라와 달리 적대관계가 아니었다. … (중략) … 백제의 선진문화 전래와 일본의 군사적 지원이라는 5~7세기 양국의 외교전략이었거니와, 기본 방향이기도 하였다.
* 신형식, 󰡔백제의 대외관계󰡕, 주류성, 2005, 159․167쪽.

延敏洙 :  백제와 왜는 국교의 성립에서 멸망에 이르기까지 유래 없는 친연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던가 … (중략) … 끊임없이 반복되는 한반도의 전란의 와중에서 백제는 자국의 확실한 동맹세력은 바로 왜국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중략) … 남조와의 통교가 단절 된 후 왜왕권에 있어서 백제는 남조의 선진문물을 받아볼 수 있는 유일한 루트였고 왜국의 문화적 후진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 (중략) … 수당제국이 출현하면서 왜왕권의 외교는 다면화되고 지배층내부에서도 외교를 둘러싼 분열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나 결국은 백제편에 서서 백제최후의 날을 맞아들인다.
*延敏洙, 「百濟의 對倭外交와 王族」, 󰡔百濟硏究󰡕 27,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97, 215-216쪽.

兪元載 :  백제는 근초고왕대부터 왜와 접촉을 시작하였다. 그 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더 나아가서 부흥운동기까지 그 관계는 지속되었다. 이 기간에 이루어진 백제의 대왜관계의 성격은 정치적․문화적인 측면에서 파악하여야 한다. … (중략) … 백제와 왜의 정치적 관계는 시기에 따라 약간 소원한 때도 있었지만, 계속적으로 우호적인 관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 (중략) …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백제인들의 문화전수 활동으로 일본 고대문화의 뿌리를 이루게 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 (중략) … 결론적으로 백제와 왜의 관계는 기본적인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한 문화전수자적인 성격으로 파악할 수 있다.
* 兪元載, 「백제의 대외관계 : 왜와의 관계」, 󰡔한국사󰡕 6, 국사편찬위원회, 2003, 161-162쪽.

尹明喆 :  백제인들은 일본열도로 조직적으로 진출했다. 즉 정치적으로 정벌하고, 군사적으로 침략을 한 것이다. … (중략) … 6세기 중반에 야마도 정권에서 친백제계인 蘇我씨가 등장하고, 쇼오토쿠 태자가 실권을 장악하므로서 백제는 더욱 활발하게 진출했다. 소가 우지는 백제계의 호족인데 외척으로서 정계에서 강력한 신흥세력이 되었다. 불교가 공인되는 과정에서 정권을 장악하는데, 이 과정에서 백제의 후원이 있었다.
* 윤명철, 󰡔한국해양사󰡕, 학연문화사, 2003, 129-132쪽.

李基東 :  百濟와 倭國(日本)과의 兩國 關係史는 여러 시기에 걸친 韓․日 관계사를 통틀어 드물게 나타나는 善隣友好의 역사였다. 그것은 … (중략) … 약 3백년 간에 걸쳐서 정치․외교․군사 및 문화의 모든 면에서 시종일관 긴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古代 韓․日 양국간의 관계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백제와 왜국 양국간의 관계의 역사만큼 큰 比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달리 없다고 생각된다. 진실로, 그것은 고대 韓․日관계의 實相을 구명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의 과제일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일본 고대문화의 형성과정 내지는 일본 고대국가의 성립과정의 一面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간과할 수 없는 긴요한 과제가 되어 있다.
* 李基東, 「百濟의 勃興과 對倭國 관계의 성립」, 󰡔百濟史硏究󰡕, 一潮閣, 1996, 196쪽.

李丙燾 :  百濟國과 倭國과는 始終 友好關係를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百濟의 온갖 部門의 文物과 學者, 其他專門家, 技術者들이 물흐르듯 東으로 派送되어 日本上代文化를 啓發하고 向上시킨 공헌이 많았던 만큼, 百濟는 可히 日本의 「師傳國」이라고 일커를 만 하였다.
*李丙燾, 「百濟學術 및 技術의 日本傳播」, 󰡔百濟硏究󰡕 2, 忠南大學校 百濟硏究所, 1971, 11쪽.
․ 極東의 日本은 매우 유치하여 문화의 거의 모든 부분을 우리 三國에 依賴치 아니하면 아니 되었고, … (중략) … 三國가운데도 백제는 일찍부터 일본과 우호 관계를 맺어온 까닭에 일본의 문화향상에 가장 큰 공헌과 寄與를 하였으니 漢學 불교를 비롯하여 농업기술, 織造技術 기타 醫藥 天文 地理 音樂 美術 工藝 建築 陰陽 占術에 이르기까지 傳受치 아니함이 없었다. … (중략) … 그 시대의 일본의 문화란 것은 거의 三國文化 특히 백제문화의 연장 혹은 移植이라 할 만 하였다.
*李丙燾, 󰡔韓國史大觀󰡕, 東方圖書, 1983, 110-111쪽.

李道學 :  백제와 왜가 수교한 이래 백제가 소멸되는 그 날까지 왜에게 엄청난 정신적․물질적 선물을 안겨주었다는 것이다. 유교․불교를 비롯하여 낱낱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요, 질적으로도 단연 우수한 선진 문물이었다. 백제는 문화 전수자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던 것이다. 반면 왜는 군대를 출병시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의 역학관계에서 백제가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데 일조해주었다.
* 이도학, 󰡔살아있는 백제사󰡕, 휴머니스트, 2003, 415-416쪽.

李永植 :  백제와 왜의 교류는 4세기 중․후엽 최초의 외교교섭이 시작되었고, 7세기 중․후엽 백제멸망기의 군사적 지원에 이르기까지 진행되었다. … (중략) … 교섭의 전 기간 우호관계 일변도였다는 것이 백제와 왜의 교류가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특징이 될 것이다. … (중략) … 4세기는 백제와 왜의 공적교류의 시작이라는 의미가 있다. 5세기는 4세기의 성립된 외교관계를 기초로 대고구려전 수행을 위한 연합군의 구성과 협동작전의 전개로 진전되었던 시기였다. 6세기는 백가 가야에 대한 외교 전략을 수립․추진하고, 한강유역회복전 등 고구려와 신라에 대한 전쟁수행에 필요한 군사적 교섭이 진행되었던 시기로, 백제는 적극적으로 선진문물을 공여하였고, 왜는 반대로 급부적 군사지원이 두드러졌던 시기였다.
* 이영식, 「4~6세기 백제와 왜의 교류사」, 󰡔百濟의 對外交涉󰡕,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7, 279-281쪽.


세부적인 견해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들은 백제의 대왜관계를 상당부분 유사하게 인식하는 듯싶다. 그것은 양국관계가 기본적으로 親善․友好關係를 바탕으로 하되 백제에서는 先進文物을, 왜에서는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는 형태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다소 도식화되었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겠지만, 이전의 민족주의 역사인식과 비교할 때 매우 의미 있는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과거 양국 간의 관계를 백제 우세에 다소 일방적으로 바라보던 것에서, 이제는 양국을 비교적 대등한 위치에 놓고 그들의 상호 이해관계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학계의 성과와는 별개로, 오늘날 한국인의 고대 한일관계사 인식은 신채호 이래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러한 역사 인식은 국사교과서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A-5] 삼국의 정치와 발전 :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에 크게 발전하였다. … (중략) …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삼국간의 항쟁 :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 (중략) …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또한 일본에 불교를 전하기도 하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 백제 멸망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들은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 (중략) … 이 때 왜의 수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백강 입구까지 왔으나 패하여 쫓겨 갔다.

삼국의 경제 정책 : 삼국의 국제 무역은 4세기 이후 크게 발달하였다. … (중략) … 백제는 남중국 및 왜와 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 : 삼국 중에서 일본과 가장 가까웠던 백제가 삼국 문화의 일본 전수에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4세기에 아직기는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뒤이어 일본에 건너간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고 가르쳤다. 6세기에는 노리사치계가 불경과 불상을 전하였다. 이렇게 전래된 백제 문화를 바탕으로 일본의 세계적 자랑인 고류사 미륵 반가 사유상과 호류사 백제 관음상이 만들어졌다. 이밖에도 5경 박사, 의박사, 역박사와 천문박사, 채약사 그리고 화가와 공예 기술자들도 건너갔는데 이들에 의하여 목탑이 세워졌고, 나아가 백제가람 양식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 (중략) … 이처럼 삼국의 문화는 6세기경의 야마토 조정의 성립과 7세기경 나라 지방에서 발전한 아스카 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사편찬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본문

위의 [A-5]에서 알 수 있다시피 오늘날 국사교과서에 반영되어있는 백제의 대왜관계는 그 양적으로나 내용면에서나 文化史 부분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문화사 부분은 일방적으로 백제에서 왜로 전파된 선진문물을 소개하는 것에 할애되고 있는데, 여기서 백제는 마치 文化傳受者인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더욱이 政治史 부분에는 양국 간 대등한 정치관계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九州로의 진출이라는 다소 애매모호한 대목이 엿보일 뿐이다. 이처럼 국사교과서에는 일본문화에 대한 삼국의 상대적 우위가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앞서 [A-2, 3, 4]에서 언급한 과거 민족주의 역사인식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그런데 책의 머리말에는 교과서 편찬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A-6] 국사 교육의 목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있다. 이는 국사가 곧 우리 자신이 살아온 모습이고, 민족 정체성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 역사는 현재의 뿌리이자 미래를 전망하는 단서이고, 우리 삶의 총체이므로 발전적이고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본 교과서를 통하여 학생 여러분이 민족사에 대한 긍지를 가지는 한편 건전한 역사 인식과 세계 시민 의식을 함께 높이기를 기대한다.
국사편찬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머리말

바로 國史라는 교과의 목적이 우리역사의 主體性과, 민족사에 대한 긍지를 고취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역시 결코 국사교육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 국사교육은 국민정서에 크게 이바지하는 것인 만큼, 기왕의 연구 성과와 더 이상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사상 가장 민감한 영역 중 하나인 고대사, 그 중에서도 한일관계사와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오늘날 한국인이 바라보는 백제의 대왜관계는 현행 역사학계의 성과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것의 원인은 단연 민족주의고, 그것이 바람직한 역사인식에 장해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역사를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백제에게 왜는 도대체 어떠한 존재였을까? 필자는 새삼 백제인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Ⅲ. 고대적 인식으로의 회귀

1. 백제인의 천하관 문제

우리가 본격적으로 百濟人의 對倭認識을 알아보기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天下觀’의 문제이다. 사실 우리는 전근대 왕조들의 대외관계를 언급할 때면 으레 천하관 그 자체에서 역사적 사실을 도출한다든지, 혹 그것을 前提로 삼는 경우가 많다. 물론 천하관은 당대인의 인식이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천하관이 항상 당대의 實質的 國際秩序를 충분히 반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천하관의 일반적인 정의는 ‘現世에 있어서 국․내외 현실적인 정치질서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이는 어디까지나 인식의 영역이지 실질적 사실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천하관은 비교적 국가 간 소통이 원활치 않았던 고대의 경우 더욱 자의적이었으며, 이 경우 백제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백제의 대왜관계 사료 중 그들의 천하관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으로는 七支刀가 있다. 다음의 사료를 보자.

[B-1] 前面 : 태□ 4년 5월 16일 한낮에 백번 제련한 철로 七支刀를 만들었으니 모든 兵害를 물리칠 수 있고, 侯王에게 적합하다. □□□□가 만들었다.
後面 : 先世이래 이러한 칼이 없었으나, 百濟王의 世子가 성스러운 계시를 받고 奇異하게 태어나 倭王을 위해 정교히 만들었으니 後世에 전하여 보아라.
「七支刀 銘文」

[B-2] 52년(372) 가을 9월 丁卯 초하루 丙子 久氐 등이 千熊長彦을 따라와서 七枝刀 1자루와 七子鏡 1개 및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日本書紀󰡕 권9 氣長足姬尊 神功皇后

위의 [B-1, 2]는 現存하는 칠지도 관련 주요 사료들로 전자는 實物 칠지도의 새겨진 銘文이고, 후자는 文獻上에 나타나는 칠지도이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칠지도는 19세기 후반 日本 石上神宮에서 발견된 이래 거의 1세기 동안 한․일 고대사연구의 뜨거운 화두 중 하나였다. 논쟁은 일본학계가 칠지도를 任那日本府說의 근거로 연구하면서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日本書紀󰡕 神功皇后條의 [B-2] 기사를 전제로 ‘百濟獻上說’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신공황후조의 사료비판과 칠지도 명문의 정밀판독이 실시되면서 이러한 주장은 점차 힘을 잃었다. 대신 한국학계에서는 8세기의 역사인 󰡔일본서기󰡕가 그 이전의 金石文의 전제가 될 수 없음을 근거로 칠지도 명문 그 자체에 주목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 측에서는 칠지도 명문에 나타나는 ‘侯王’과 ‘傳示後世’ 등의 명령구적 표현을 토대로 ‘百濟下賜說’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한편 혹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侯王’의 표현에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한편, 칠지도 하사의 동기와 성격 및 용도를 추적하여 백제와 왜 조정간의 상하관계까지 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대인의 천하관이 지극히 자의적이었던 것을 상기할 때, 칠지도 명문에 반영된 백제인의 천하관이 당시 백제와 왜 조정 간의 실질적 상하관계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었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실제로 이러한 백제인의 자의적인 천하관은 백제사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우선적으로 살펴볼 것은 ‘百濟 王室의 自尊意識’이다.

[B-3] 24년(369) 겨울 11월에 漢水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하였다. 모두 黃色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三國史記󰡕 권24 百濟本紀 近肖古王

[B-4] 建武 2년(495)에 牟大(東城王)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 (중략) …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沙法]名 등의 꾀이오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沙法名을 假行征虜將軍 邁羅王으로, 賛首流를 假行安國將軍 辟中王으로, 解禮昆을 假行武威將軍 弗中侯로 삼고, 木干那는 과거에 軍功이 있는 데다 또 城門과 선박을 때려 부수었으므로 行廣威將軍 面中侯로 삼았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南齊書󰡕 권58 東南夷列傳

[B-5] 우리 百濟王后께서는 … (중략) … 己亥年(639)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원하옵니다. 世世토록 하는 공양이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善根으로써 우러러 資糧이 되어 大王陛下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蒼生을 교화하게 하소서. 「彌勒寺西塔舍利奉安記」

위의 사료 [B-3, 4, 5]는 각각 近肖古王, 東城王, 武王代의 사실을 전하고 있다. 먼저 [B-3]에 나타나는 근초고왕의 사열은 그가 雉壤에서 고구려에 승리한 직후에 행해진 것인데, 흥미로운 것은 당시 사열에 사용되었던 깃발이 모두 黃色이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황색은 陰陽五行에서 말하는 五方色 중 중앙의 색, 즉 皇帝의 색이다. 그렇다면 그가 황색깃발을 사용한 것은 백제 왕실의 위상이 매우 고양된 시점에서 그들의 자신감을 표출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한편 [B-4]의 上表文은 동성왕이 南朝의 황제에게 신하들의 관작제수를 요청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동성왕이 요청하고 있는 신하들의 관작은 王과 侯에 해당한다. 이는 동성왕이 왕 이상의 존재였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인데, 당시 高句麗나 新羅의 예로보아 그는 大王意識을 표방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동성왕은 대왕의 지위에서 왕과 후를 거느리고자 했던 것이며, 이는 중국의 王․侯制와도 흡사하다. 그리고 이러한 대왕의식은 무왕대의 사실을 전하는 [B-5]에서 확인되듯이 백제 말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B-6] 寧東大將軍인 百濟 斯麻王은 나이가 62세 되는 癸卯年(523) 5월 壬辰日 인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8월 갑신일인 12일에 안장하여 大墓에 올려 뫼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武寧王陵誌石」

또한 [B-6]을 보면 백제 왕실에서는 왕이 죽은 뒤 墓誌石에 ‘崩’자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해당 글자는 황제의 죽음을 일컫는 용어로, 󰡔三國史記󰡕에 빈번히 나타나며 諸侯의 죽음을 일컫는 ‘薨’자와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백제 왕실의 의례는 대왕보다도 한 단계 더 높은 황제의 그것을 사용했던 것 같다.

[B-7] 括地志曰, 百濟四仲之月, 祭天及五帝之神. 冬夏用鼓角, 奏歌舞, 春秋奏歌而已. 解陰陽五行, 用宋 元嘉曆. 其紀年無別號, 但數六甲爲次第, 亦解醫療, 蓍龜占相.
󰡔翰苑󰡕 蕃夷部 百濟

실제로 위의 [B-7]을 보면 백제는 독자적인 제천행사와 함께, 중국황제의 年號를 좇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근대 동아시아세계에서 제천행사는 황제에게 허락된 특권이었으며, 연호를 따른다는 것은 황제의 우주관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백제 왕실은 훗날 신라가 자신의 연호를 버리고 중국의 것을 따를 때조차, 그들만의 역법을 고집했던 것이다.

다만 이러한 백제 왕실의 자존의식은 어디까지나 자국 내에서의 문제지, 주변국이 함께 공인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백제 역대 왕들의 책봉명은 물론이거니와, 주변국의 사료에서조차 백제왕이 대왕이라고 언급된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다.

[B-8] 27년(549) 겨울 10월에 왕이 梁의 서울에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지 못하고 使臣을 보내 朝貢하게 하였다. 사신이 그곳에 이르러 성과 대궐이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모두들 대궐 단문 밖에서 소리 내어 울었는데, 행인들이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侯景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들을 투옥하였다. 그 후 그들은 후경의 난이 평정된 뒤에야 비로소 귀국하였다. 󰡔三國史記󰡕 권26 百濟本紀 聖王

특히 백제인들은 거의 수시로 중국에 사신을 보내 황제를 알현할 정도로 대중국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고 [B-8]에서 보이듯 侯景의 亂 당시 백제 사신이 보여준 모습에서는 의연함 마저 느끼게 된다. 결국 백제 왕실은 自尊과 事大의 중간에서 이중적 모습을 취했던 것이고, 이때의 천하관은 매우 가변적인 것이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百濟人의 주변국 認識’이다.

[B-9] 49년(369) 봄 3월 … (중략) …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比自□·南加羅·□國·安羅·多羅·卓淳·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古奚津에 이르러 南蠻 耽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肖古와 왕자 貴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日本書紀󰡕 권9 氣長足姬尊 神功皇后

[B-10] 百濟는 도성을 '固麻'라고 하고, 읍을 '檐魯'라 하는데, … (중략) … 주변의 소국으로는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 등이 부속되어 있다.
「梁職貢圖」 百濟國使

위의 사료 [B-9, 10]은 각각 근초고왕과 武寧王代의 사실을 전하고 있다. 먼저 [B-9]의 기사에서는 南蠻 耽彌多禮라는 표현이 주목된다. 왜냐하면 오늘날 濟州道로 비정되는 침미다례를 남만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건 백제를 중심으로 바라보았을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해당 기사에 대해 일찍이 이병도는 그 주체를 백제로 바꾸되, 백제와 왜 조정간의 만남 그 자체는 회담정도로 이해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위 기사는 백제의 주변국 인식이 훗날 󰡔日本書紀󰡕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 이 때 백제 측의 침미다례 인식은 중국의 전통적 천하관 중 하나인 四夷觀과 유사하다.

한편 [B-10]은 형주자사 蕭繹(후의 元帝)이 梁에 조공 온 사신들의 모습과 그들 국가의 해설을 적은 것이다. 특히 「梁職貢圖」는 이후 󰡔梁書󰡕 諸夷傳의 기초가 될 정도로 사료적 가치가 크며, 여기에는 사신들로부터 얻은 정보가 상당부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신도에 따르면 당시 백제는 주변의 소국으로 叛波(大伽倻), 卓(卓淳國), 斯羅(新羅) 등을 거느리고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이는 「廣開土王陵碑」에서 ‘天帝之子’를 표방한 高句麗가 百濟와 新羅를 屬民으로 삼고 있었다고 밝힌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러한 백제의 주변국 인식은 앞서 백제 왕실의 자존의식과 마찬가지로 매우 자의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B-9]의 내용과 달리 백제가 제주도를 실질적 지배권 안에 둔 것은 5세기 말 동성왕대에 이르러서였고, 榮山江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그보다 더 뒤인 聖王代였다. 뿐만 아니라 사료 [B-10]이 서술된 시점의 대가야와 신라는 사실상 독립국이었으며, 그 중 신라의 경우는 이미 백제와 대등한 수준으로 성장해 있었다. 결국 백제인은 자의적인 주변국 인식을 통해 그들 스스로의 위상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고, 여기에 실질적 국제질서는 크게 문제시 되지 않았다.

백제인의 천하관은 지극히 자의적이고, 공간적으로는 비교적 국내에 한하며, 실질적 국제질서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앞서 살펴본 칠지도 명문 속에 백제인의 우월의식이 보이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우리가 백제 대왜관계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는 현재적 역사인식 뿐 아니라 당대인의 천하관이라는 장벽 역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2. 백제 對倭關係의 본질

百濟人의 天下觀에 그들의 자의적 國際觀이 반영되어있다면 百濟 對倭關係의 本質을 이해가 위해서는 어떠한 접근이 필요할까? 필자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유사한 시기의 양국간 사료를 비교․검토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제 3자의 사료 및 考古學的 자료역시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도대체 백제에게 왜는 어떠한 존재로 인식되었을까?

우선 백제에게 왜는 ‘政治․軍事的 協力者’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사실 이는 󰡔三國史記󰡕나 󰡔日本書紀󰡕에 양국 간 전쟁기사가 전무하다는 것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高句麗가 倭를 격퇴한 것이나, 신라가 왜군의 침입에 고심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특히 백제는 오히려 왜와 군사적 행동을 같이 하기까지 하였다.

[C-1] 永樂 9年(399) 己亥에 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倭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倭人이 그 國境에 가득 차 城池를 부수고 奴客으로 하여금 倭의 民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 (중략) … 14년 甲辰에 倭가 法度를 지키지 않고 帶方 지역에 침입하였다. 「廣開土王陵碑」

[C-2] 6년(397) 여름 5월에 왕이 倭國과 우호 관계를 맺고 太子 腆支를 人質로 보냈다.
󰡔三國史記󰡕 권25 百濟本紀 阿莘王

위의 사료 [C-1]은 고구려 「廣開土王陵碑」에 새겨진 내용으로, 해당기사는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본 백제와 왜의 관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되는 永樂 9년 백제와 왜의 화통기사는 비슷한 시기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C-2]처럼 阿莘王이 왜와 우호를 맺고 太子 腆支를 人質로 보냈다는 것인데, 흥미로운 점은 이 우호기사 이후 왜의 본격적인 군사행동이 [C-1]에서 확인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는 왜와 우호를 맺고, 그들에게 태자를 인질로 보냄으로써 군사적 협력을 성공리에 이끌어 냈던 것이다.

물론 백제의 對倭外交에 있어 태자의 파견과 관련해서는 일찍이 그 성격을 인질이 아닌 일종의 대사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정치적 외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안 중 하나가 양국 간 신뢰임을 고려할 때, 백제측은 그들의 王位繼承權者를 인질로 보내는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信義를 보이려 했던 것이다. 실제로 아신왕의 결단은 왜의 군사적 협력을 이끌어냄으로써 증명되었고, 이후 이러한 외교형태는 定例化 되었다.
한편 백제에 대한 왜의 군사적 지원은 백제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C-3] 豊이 이를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福神을 급습하여 죽이고, 高句麗와 倭國에 사람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여 당나라 군사를 막았는데 … (중략) … 白江 어귀에서 왜국 군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도 붉은 빛을 띄웠다. 󰡔三國史記󰡕 권28 百濟本紀 義慈王

[C-4] 龍朔 3년(663)에 이르러서 摠管 孫仁師가 군사를 이끌고 부성을 구원하러 왔는데, 신라의 병사와 말도 또한 나아가 함께 정벌하여 가서 주류성 아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倭의 수군이 백제를 도우러 와서 왜의 배 1천 척이 白江에 정박해 있고 백제의 정예기병이 언덕 위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三國史記󰡕 권7 新羅本紀 文武王

[C-5] 2년(663) 3월 前將軍 上毛野君稚子·間人連大蓋, 中將軍 巨勢神前臣譯語·三輪君根麻呂, 後將軍 阿倍引田臣比邏夫·大宅臣鎌柄을 보내 2만 7천 인을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했다. … (중략) … 이에 百濟는 적이 계획한 바를 알고 여러 장수들에게 “지금 듣건대 日本國에서 구원하러 온 장수인 廬原君臣이 씩씩한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바로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한다. 여러 장군들은 미리 도모하기를 바란다. … (중략) … 戊申 日本의 수군 중 처음 도착한 배들이 唐의 수군과 만나 싸웠는데, 日本이 불리하여 물러났다. 唐은 굳게 진을 치고 지켰다. 󰡔日本書紀󰡕 권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

[C-6] 仁願은 齊兵을 증원받고 나서 사기가 진작되었다. 이에 新羅王 金法敏과 함께 보병·기병을 이끌고, 劉仁軌로 하여금 水軍을 거느리고 가게 하여 熊津江에서 동시에 進軍하여 周留城으로 육박하였다. 豊의 무리는 白江 어귀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을 사면에서 공격하여 다 이기고, 4백 척의 배를 불사르니, 豊은 도망쳐 자취를 감추었다.
󰡔新唐書󰡕 권220 東夷列傳

위의 [C-3, 4, 5, 6]은 모두 백강전투라는 동일한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를 보이나 해당 사건은 韓․中․日 역사서에서 모두 전하고 있는 만큼 신빙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당시 동아시아의 대세를 모를 리 없었던 왜 조정이 唐에 적대해서까지 百濟復興軍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물론 왜 조정의 군사파견과 관련해서는 일본열도 위기설, 백제에 대한 종주국론, 내부적 단결, 선진문물 수용로의 확보 등이 지적되고 있지만, 그것이 어찌되었건 간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백제부흥운동의 최종장에서 백제의 편에 서있던 이는 왜가 유일했다는 것이다.
또한 백강에서 패전하고 백제의 부흥이 좌절된 이후에도 왜는 백제계 渡來人들을 도외시 하지 않았다.

[C-7] 2년(663) 9월 甲戌 日本의 수군 및 佐平 餘自信, 達率 木素貴子, 谷那晋首, 憶禮福留와 국민들이 弖禮城에 이르렀다. 다음날 배를 띄워 비로소 日本으로 향했다. … (중략) … 4년(665) 봄 2월 이 달 百濟國의 官位와 계급을 대조하였다. 그리고 佐平 福信의 공 때문에 鬼室集斯에게 小錦下를 제수했다. 그 본래의 관위는 達率이다. 다시 百濟의 백성 남녀 400여 인을 近江國 神前郡에서 살게 했다. … (중략) … (3월) 이 달 神前郡의 百濟人에게 토지를 지급했다. 󰡔日本書紀󰡕 권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

[C-8] 21년(472) 9월에 高句麗王 巨璉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 (중략) … 文周가 곧 木劦滿致와 祖彌桀取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三國史記󰡕 권25 百濟本紀 蓋鹵王

[C-9] 25년(414) 百濟의 直支王이 죽었다. 곧 아들 久爾辛이 왕위에 올랐다. 왕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木滿致가 國政을 잡았는데, 왕의 어머니와 서로 정을 통하여 무례한 행동이 많았다. 天皇은 이 말을 듣고 그를 불렀다. 󰡔日本書紀󰡕 권10 譽田天皇 應神天皇

위의 사료 [C-7]에서 보이듯이 왜는 백강에서 패퇴한 직후 백제관료들의 망명을 도왔다. 또한 그들이 渡日한 이후에는 백제에서의 관위와 계급을 고려하여 그에 상응하는 왜국내 관직을 제수하였으며, 일반 백성들에게까지도 토지를 할당해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백제 도래인에 대한 대우는 비단 이 시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로 [C-8, 9]에서 보이듯 漢城百濟가 몰락하는 바로 그 시점에 木劦滿致 즉, 木滿致의 망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후 목만지의 후손들이 蘇我氏로 불리며 왜 조정에서 일대 활약했던 것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이다.

다음으로 백제에게 왜는 ‘文物交流의 相對’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앞서 필자는 오늘날 국사교과서에 일본에 대한 백제문화의 상대적 우월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역사서술에 사료적 근거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C-9] 15년(404) 가을 8월 壬戌 초하루 丁卯 百濟王이 阿直岐를 보내어 좋은 말 2필을 바쳤다. … (중략) … 阿直岐는 또 經典을 잘 읽었으므로 太子인 菟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 때 天皇은 阿直岐에게, “혹 너보다 뛰어난 박사가 또 있느냐”고 물으니, “王仁이라는 분이 있는데 훌륭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上毛野君의 조상인 荒田別과 巫別을 百濟에 보내어 王仁을 불렀다. 󰡔日本書紀󰡕 권10 譽田天皇 應神天皇

[C-10] 13년(552) 10월 百濟 聖明王이 西部의 姬氏 達率 怒唎斯致契 등을 보내어 釋迦佛金銅像 1軀와 幡蓋 약간, 經論 약간 권을 바쳤다. 따로 表를 올려 (佛法을) 유통시키고 예배하는 공덕을 찬양하여 … 云云 󰡔日本書紀󰡕 권19 天國排開廣庭天皇 欽明天皇

왜냐하면 위의 [C-9, 10]과 같이 일본 측 문헌 자체에 백제로부터의 儒․佛敎文化의 전래 과정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阿直岐와 王仁의 경우 오늘날에도 신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法隆寺의 百濟․救世觀音像 등은 성왕대 불교전래의 증거로서 實傳하고 있다. 

 

이처럼 백제는 다방면에 걸쳐 문물을 왜로 전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제가 이렇게까지 왜로 문물을 전달하며 친선․우호관계를 유지하려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한반도 정세 속에서 백제는 왜의 정치․군사적 협력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다. 泗沘時代 왜에서 백제로의 군사지원에 거의 어김없이 백제 측의 문물지원이 선행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한편 양국 간 문물교류의 양상은 반드시 백제에서 왜로의 일방적인 형태가 아니었다.

[C-11] 26년(548) 봄 정월에 고구려 왕 평성이 濊와 공모하여 한수 이북의 獨山城을 공격해왔다.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朱珍을 시켜 갑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고구려 군사들과 일전을 벌려 크게 이겼다. 󰡔三國史記󰡕 권26 百濟本紀 聖王

[C-12] 7년(546) 봄 정월 甲辰 초하루 丙午 백제의 사신 中部 奈率 己連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갔다. 이에 좋은 말 70필과 배 10척을 내려 주었다. … (중략) … 9년(548) 겨울 10월 370명을 백제에 보내어 得爾辛에 성을 쌓는 것을 도왔다. … (중략) … 12년(551) 봄 3월 보리 씨앗 1,000斛을 백제왕에게 내려 주었다.
󰡔日本書紀󰡕 권19 天國排開廣庭天皇 欽明天皇

[C-13] 元年(662) 봄 정월 辛卯 초하루 丁巳 百濟의 佐平 鬼室福信에게 화살 10만 개, 絲 500斤, 綿 1천 斤, 布 1천 端, 부드러운 가죽(韋) 1천 장, 볍씨(稻種) 3천 斛을 주었다.
󰡔日本書紀󰡕 권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

위의 사료 [C-11]은 성왕 26년조에 나타나는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 기사이다. 그런데 백제본기에 따르면 당시 백제를 지원한 세력은 羅濟同盟을 체결했던 신라뿐이었다. 하지만 일본 측 사료 [C-12]에는 그해 10월 왜 조정이 백제 측에 인부를 지원해 築城을 도왔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백제는 고구려의 남침에 신라와 연합하는 한편 왜에도 지원을 요청했던 것인데, 이때 왜로부터 온 지원은 [C-12]에 보이듯 말과 배, 인부와 보리씨 등의 물적 자원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으로부터의 지원은 [C-13]처럼 백제 부흥운동 당시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考古學的으로도 증명된다. 한반도 내 왜계 유물은 이미 3~5세기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6세기에 이르러서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백제 望夷山城에서는 列島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裝板釘結板甲이 출토되었으며, 고대 일본의 제사유적에서 자주 확인되는 母子曲玉의 경우 이 시기 부여 군수리, 황전면 월산리, 광양시 용강리, 신안군 압해도, 고흥군 방사유적 등에서 출토되고 있다. 더욱이 70년대 발굴돼 세상을 놀라게 한 武寧王陵에서는 10점 이상의 왜계 硬玉製 曲玉과 출토되었고, 그 棺은 日本産 金松으로 짜여있었다. 일제강점기 발굴조사에 의하면 부여군 능산리 고분군과 익산 쌍릉에서도 금송재 木棺이 확인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백제 왕실이 왜로부터 棺材를 수입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고대 백제의 대왜관계는 일방적이지도, 그렇다고 해서 선진문물의 전수와 이에 대한 군사적 협력의 도식적 형태로도 설명되기 힘든 것이었다. 오히려 양국의 외교관계는 상호 이해관계를 고려하며 다방면에 걸쳐 복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과정에서 백제에게 왜는 정치․군사적 협력자인 동시에 문물교류의 대상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그것은 비교적 대등한 수준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때 그 전제조건은 무엇보다도 양국간 신뢰였다.

[C-14] 16년(555) 봄 2월 백제 왕자 餘昌이 왕자 惠(왕자 惠는 威德王의 아우이다)를 보내어 “聖明王이 賊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5년(554)에 신라에게 죽음을 당했으므로 지금 그것을 아뢰었다. 천황이 듣고서 가엾고 한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使者를 보내어 나루에서 맞이하여 위문하였다. 󰡔日本書紀󰡕 권19 天國排開廣庭天皇 欽明天皇

[C-15] 천황은 福信이 청한 뜻에 따라 은혜롭게 筑紫에 행차하여 구원군을 보낼 것을 생각하고, 처음 이 곳에 와서 여러 軍器를 갖추었다. … (중략) … 7년(661) 봄 정월 丁酉 초하루 丙寅 御船이 서쪽을 정벌하려고 비로소 바닷길로 나아갔다. … (중략) … 11월 壬辰 초하루 戊戌 천황이 죽었으므로, 飛鳥의 川原에 관을 안치했다.
󰡔日本書紀󰡕 권26 天豐財重日足姬天皇 齊明天皇

위의 사료 [C-14, 15]에는 백제 성왕의 죽음에 슬퍼하는 欽明天皇과, 백제부흥을 돕기 위해 몸소 군비를 준비하다 급사한 齊明天皇이 묘사되고 있다. 물론 해당기사에 어느 정도 윤색이 가해졌을지는 모르겠으나, 이들의 모습은 백제 멸망기 그들을 도외시한 高句麗나, 백제를 배신하면서까지 漢江을 차지하려 했던 新羅, 그리고 百濟 주도의 任那復興會議를 끝끝내 의심한 伽倻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백제에게 왜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제일의 友邦國이었던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百濟 對倭關係의 歷史的 本質이라고 생각한다.


Ⅳ. 맺 음 말

이상으로 필자는 고대 백제의 對倭關係와 그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본 문의 내용을 정리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일찍이 백제의 대왜관계와 관련된 연구는 구한말로부터 시작돼 초기 이 문제를 주도한 것은 申采浩 이래의 民族主義 史學者들이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백제의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한편, 일본으로의 일방적인 선진문물 전파양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러나 종래 그들의 연구는 90년대 이후 역사학계 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마침내 오늘날에는 백제와 왜의 관계를 비교적 대등한 입장으로 바라보되, 그들의 상호 이해관계를 고려하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다만 이러한 역사학계의 성과와는 별개로 한국인들의 한일고대사 인식은 여전히 과거 민족주의 역사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며, 이는 국사교과서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현재적 인식에서 벗어나 고대적 인식으로 회귀할 필요성을 제안했던 바, 이때 우선적으로 천하관의 문제를 다루었다. 천하관은 당대인의 인식이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식의 영역이고, 지극히 자의적이기 때문에 그 내용자체에서 실질적 국제질서를 도출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대신 필자는 양국 사료의 비교, 제 3자의 시각,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백제인의 대왜국 인식을 알아보고자 시도했다. 그 결과 백제의 대왜관계는 일방적인 형태로는 물론이거니와 기왕의 선진문물의 전파와 군사협력이라는 형태로도 도식화될 수 없음을 발견했다. 오히려 양국의 외교관계는 상호 이해관계를 고려하며 다방면에 걸쳐 복합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양국관계는 기본적으로 대등한 위치에서 전개되었으며, 그 전제조건은 단연 신뢰였다. 그 결과 양국 문헌에는 단 한차례의 전쟁기사도 전하지 않으며, 왜 조정은 唐의 등장과 백제의 멸망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조차 백제의 손을 들었다. 이처럼 백제에게 왜는 한반도 제세력이나 중국 역대왕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제일의 우방국이었던 것이고, 이것이야 말로 백제 대왜관계의 역사적 본질일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에게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로 인식되며, 그 역사를 바라볼 때면 으레 ‘역사를 잊지 말자’라는 언구를 되새긴다. 그것은 약 1세기동안 학계의 성과와 별개로 멀게는 임진왜란, 가깝게는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경험이 民族主義로 발아한 까닭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인식은 자연스레 고대사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영향 미쳐 오늘날 고대 한일 양국의 위상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다.

그러나 실상 역사를 바라보면 양국관계에는 부정적 시기만큼이나, 친선․우호의 시간 역시 매우 길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일고대사에도 적용되거니와, 그 중심에는 百濟와 倭가 있었다. 물론 이러한 사고의 전환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제는 고대 한일관계사의 부정적 측면만큼이나 긍정적 측면 역시 주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그때 ‘역사를 잊지 말자’라는 언구는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천 육백여년 전 백제인의 손으로 벼려진 七支刀에는 ‘傳示後世’의 글귀가 전해지고 있다. 글을 마치는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건 데, 혹 백제인 그들이 진정 바랐던 ‘전시후세’는 ‘그들의 우호관계를 傳하여 後世에 보여라(示)’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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