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 지켜야 할 가치 그리고 지성인의 신념

‘맨 어브 라만차(Man of La Mancha)’에서 돈키호테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결투를 선언한다. “듣거라.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인 세상아. 너희들의 추잡함은 끝에 이르렀구나. 그러나 여기 용감한 기사가 있어 깃발을 들고 일어섰다. 자! 세상아 네게 결투를 신청하노라.” 바로 오늘의 젊은 지성이 외쳐야 할 주문이다.

 
한 시대를 표현하는 말이 있다. 딱히 시대정신(Zeitgeist)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세대를 대표하는 정서를 축약하여 표현할 수 있다. ‘과학의 시대’라는 문명 현상부터 ‘상실의 시대’와 같은 문학적 표현까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특징을 규정하여 드러내는 것이다.

오늘의 젊은이들 앞에 놓인 이 시대는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사회에서 대학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자면 아마도 ‘망각(忘却)의 시대’는 아닐까 싶다. 우리는 모두 기억과 역사의 교훈을 잊고 살아간다.
 

당연히 누리는 사회적 환경과 문명의 혜택, 정치적 자유 등은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컴퓨터란 공상소설 속의 물건이며, 정치적 자유란 구호에 불과했다. 민주주의의 종주국에서도 계층간의 차별, 성의 불평등, 노동자에 대한 박해, 사상에 대한 검열, 인종간의 억압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기 위해 몸에 기름을 붓고 온 몸으로 민주주의의 심지가 되어야 했던 일도 있었다. 또 그 반세기 전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폭정을 피하기 위해 국경을 넘고, 민족의 이름으로 총을 들어야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라 하여 사라진 것도,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는 지금도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잊지말아야 할 것 중에 근본적인 진실은 ‘우리가 인간이며, 배움을 통해 잘못을 교정해가는 존재’라는 점이다. 우리는 신이 중심인 우주의 조연도 아니고, 이념의 꼭두각시도 아니며, 물질과 자본과 권력의 노예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의 중심이며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가장 중요하다는 인문주의(人文主義)의 사유는 과거 수많은 지성의 희생과 투쟁으로 얻어진 결과이다.

자본주의의 옷을 입었지만 아직도 강력한 국가주의의 지배를 받는 중국 수도 베이징 심장에 베이징대학(北京大學)이 있다.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근대화와 공산혁명과 문화대혁명, 개방과 자본화의 중국현대사 저변에 베이징대학의 역할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공산당 시조인 리다자오(李大釗), 천두슈(陳獨秀)는 모두 베이징대학 출신이고 젊은 시절의 마오쩌둥(毛澤東)은 베이징대학 사서를 맡으며 사유의 폭을 넓혔다. 현재 일당독재인 중국공산당의 노선과 정책을 논설로 비판할 수 있는 것은 베이징대학의 특권으로 꼽힌다.

그런 베이징대학 박물관 앞에 낯선 동상이 서있다.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 ~ 1616), 돈키호테의 작가, 스페인 출신 대문호의 동상이 어쩐 일로 베이징대학 한복판에 서있는 것일까. 공식적으로 이 동상은 중국 스페인 수교기념으로 세워졌다. 그런데 왜 세르반테스인가? 그는 인문주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세르반테스는 마드리드의 대학가에서 태어나 평생을 불우하게 살았던 인물이다. 생계를 위해 군대에서 복무하고, 해적에게 잡혀 몇 해를 노예로 지냈던 그가 창조한 인물 ‘돈키호테’는 인류 문학사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광기에 가까운 용기, 사유에 갇히지 않는 행동, 세상을 바꾸려는 이상, 불의를 이기려는 선의의 신념, 자유의지에 대한 열망. 이것들이 돈키호테의 숙명이다.

동시대의 대가 셰익스피어가 번민과 회의의 인물 햄릿을 창조한 반면, 세르반테스는 결단과 행동의 인격 돈키호테를 낳았다. 흔히 돈키호테를 통해 중세의 종말과 근세의 시작을 읽는다고 한다. 돈키호테의 외침은 비단 중세의 종말에만 그치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야 하는 인간의 운명이 그 속에 담겼다.

대학이, 지성인이, 젊은이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무엇보다 인간이 중심이며 신념과 가치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베이징대학 교정에 세르반테스의 동상이 서있는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동상은 칼로 땅을 짚고 섰다. 작가가 칼을 든 모습으로 표현된 것은 나약한 지성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고 세상을 변혁할 정신의 무기를 지닌 상징이다. 사유와 문장도 강한 무기이며 총칼보다 강할 수 있다. 최근 들리는 소식은 세르반테스 동상의 칼이 부러졌다고 전한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지만, 시대의 폭력 앞에 무기를 빼앗긴 지성을 상상했다.

돈키호테를 현대 뮤지컬로 탄생시킨 데일 와써만의 ‘맨 어브 라만차(Man of La Mancha)’에서 돈키호테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결투를 선언한다. “듣거라.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인 세상아. 너희들의 추잡함은 끝에 이르렀구나. 그러나 여기 용감한 기사가 있어 깃발을 들고 일어섰다. 자! 세상아 네게 결투를 신청하노라.” 바로 오늘의 젊은 지성이 외쳐야할 주문이다.

이 세대를 ‘망각의 시대’로 규정하는 것이 억측이길 바란다. 세상의 무심한 겉모습 속에 아직도 잊지말아야 할 희생과 가치를 기억하고 있고, 무엇보다 어제의 어둠에 눈을 돌리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의 절망과 타락을 외면하지 않으며 용기로써 행동하는 오늘의 돈키호테를 기대한다. 베이징대학 교정의 세르반테스 뿐 아니라 동악의 교정, 젊은 지성의 마음에도 신념과 정의와 행동의 상징이 굳건히 서있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가 라만차의 기사가 되는 ‘용기의 시대’가 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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