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회에 민족에 눈뜨기 시작하던
  대학 이 학년 여름
  유월이면 비 맞은 감꽃이 소리 없이 지곤 하던 고향에 갔습니다
  눈치도 없이
  엄마의 가슴을 만지작거리기 좋아했던 어릴 적
  ‘엄마아 젖줘~잉’ 떼쓰면
  넉넉한 사랑을 주던 가슴은
  내 유년시절의 꿈이 자라던 곳이었습니다
  굽이굽이 새벽이슬 젖으며 이십리길 리어카를 끌고
  벌교장엘 가 채소를 판 돈으로
  서울 가야 사람이 된다고 국교 육학년 때 전학 보낸
  아들놈이 방학이 되어 내려오면
  꼬옥 껴안고 우시던 어머니,
  눈물은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없어라
  사춘기가 되어 여드름이 한창이던 내가
  버릇을 못 버리고 품속에 파고들면
  까실까실한 손으로 머리며 볼이며 엉덩이를 어루만져 주시고
  아들의 고른 숨소리가 들릴 때에야 잠드시던
  항상 눈굽이 젖어있던 어머니

  가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여름 밭에서 돌아와
  ‘우메 왜 이렇게 덥다냐’ 옷고름 풀어헤치고
  흙 묻은 머리 수건으로 땀을 닦으시는 어머니
  젖가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식 걱정에 움츠러들고 세상풍파에 깎여, 무너지고
  넉넉한 사랑도 슬픔도
  이 땅 어머니라면 누구에게나 몰아쳤을 분단의 강물에 휩쓸려가고
  쭈그렁텡이 젖무덤만 두 개 달랑 있었습니다

  오십 고개길을 힘겹게 넘고 있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보며
  나는야 조국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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