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참전은 유엔헌장에 위반

한강교 폭파사건 등 의문 계속 남아
소련 사주 의한 남침설 설득력 부족

  지난 1학기 본보에서는 ‘한국전쟁 그 기원을 찾아서’라는 제하의 학술기획을 7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이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정립에는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하나 한국전쟁 자체에 대한 설명은 미비하였다. 따라서 이를 보충하기위해 2회에 걸쳐 전쟁과정 상에 나타난 문제점을 보론으로 게재하기로 하였다. 한국전쟁이 분단고착화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이니 만큼 이 전쟁과정에 참여한 제세력의 이해관계와 전쟁의 성격 등을 올바로 이해할 때 민족의 통일은 가까워질 것이다. <편집자주(註)>

  Ⅰ. 들어가는 말
  1945년의 8월은 우리민족에게 해방의 기쁨과 분단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그로부터 44년째인 89년의 8월이 그때와 어떠한 질적인 변화 없이 쓰러지고 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우리 민족의 운명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시작되면서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은 분단의 근원과 그 모순의 절정이었던 한국전쟁이라 하겠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와 대중적 확산이 만족할 만큼 이뤄지고 있지 않는듯하다. 특히 한국전쟁에 대한 구체적, 역사적 연구가 시기상에 있어서 분단부터 전쟁 전까지의 상황인식에만 치우친 감이 있는듯하다. 물론 한국전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해내기 위해선 전쟁의 역사적 필연성과 그 과정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를 인식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이 여기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직접적인 전쟁의 전개과정을 연구해야 한다. 바로 전쟁과정에서 전쟁의 주체, 성격, 각 세력들의 이해와 요구 등이 더욱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하에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의 확대와 심화에 일조하고자 전쟁발발직후부터 중국군의 개입까지를 살펴보겠다.

  Ⅱ. 전쟁의 발발과 미국의 개입
  한국전쟁에서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과정 속에서 전쟁이 일어났는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면전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전쟁의 원인과 성격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맥이 된다고 본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아주 상반되게 존재한다. 6월25일 새벽4시를 기해 북한 측에서 대대적인 기습남침을 감행했다는 것이 미국과 남한측의 공식입장이다. 이에 대한 북측의 주장은 상반된다. 국방군이 동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북침을 개시하여 해주, 금천, 철원 일대에서는 북반부 영역에 1~2㎞까지 쳐들어왔으며 여기엔 미군사고문단의 성원들에 의해 지휘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에 김일성이 당일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와 내각 비상회의를 소집하여 즉시 결정적인 반공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고 말한다.
  어느 주장이 진실인지는 보다 더 많은 연구와 한반도내에서의 평화정착이 되어야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단지 대략 다음 사항을 커밍스 등 수정주의자는 지적하고 있다.
  ①당시 계속된 군사충돌이 대부분 남한측에 의해 비롯되었으며 전쟁당일에도 해주부근에서도 남한측의 군사도발이 있었음.
  ②전쟁직전에 미국 주요 지휘관이 38선을 돌아보고 일본에서 맥아더와 밀담이 있었다는 점.
  ③미국뿐만 아니라 남북모두 이미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에 따른 전쟁준비와 양측에 대한 경계가 날카로웠다는 점 등.
  아무튼 개전이 되자 북한의 인민군은 도처에서 한국군을 격파하고 27일에는 서울 주위가 맹렬하게 공격을 받았다. 흔히 이런 급작스런 북한군의 진격을 기습남침의 근거로 주장된다. 그러나 이에는 많은 의혹이 있다. 미군은 한국군을 아시아의 최고로 평가하고 있었으며 그 2/3가 한강이북에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한국군의 주력이 여전히 한강이북에 머물고 있었고 대부분의 중화기나 장비, 보급품도 역시 운송되지 않은 채 28일 새벽2시에 취해진 한강교 폭파사건에 의문이 있다.
  북한군의 주력이 서울시내 중심부에 들어 온 것이 28일 오후3시경인 점을 볼 때 한국군의 병력과 군사장비의 결정적 약화를 초래하고만 한강교의 성급한 폭파는 통상적인 군사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특히 문제의 이 사건은 남쪽에서 의도적으로 전쟁을 도발한 증거로서 제시되기도 한다(북침설 내지 남침유도설).
  또한 이 와중에 전쟁의 성격과 운명을 판가름하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바로 UN의 가면을 쓴 미국의 개입과 이에 대한 소련의 대응이다.
  한국에서의 전쟁발발 보고를 받은 워싱턴의 분위기는 의외로 평온하였다. 트루먼은 휴가중이었고 국무장관 애치슨이 다음의 사항을 결정하고 지시한다. ①미 민간인들의 한국에서의 철수 문제 ②맥아더 사령부와 관계없이 한국에 주둔하는 미 군사고문단이 요청하는 군장비 지급 ③한국내의 모든 작전지휘권은 맥아더가 맡는다. ④UN의 뒷받침 아래 맥아더는 7함대를 포함한 그의 모든 병력을 사용한다.
  이와 함께 미국시간으로 25일 오후2시(한국시간 26일 오전4시) UN안전보장이사회(이하 안보리)를 소집하여 소련과 분쟁당사국인 남북당국의 참여 없이 UN군(실제는 미군)의 남한측에의 참전을 통과시켜버린다. 이는 UN헌장에도 위배되는 조치였다(UN헌장 제2조 7항, 제27조 3항, 제32조 등 위반). 미군의 한국전쟁에 대한 개입은 미국의회의 승인도 받지 않은 채 이뤄졌다. 또한 UN에서의 38선의 원상회복이라는 개입명분이 백악관 의회에서의 ‘미지상군의 투입과 38선 이북에도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맥아더에게 준다’는 결정에 의해 간단히 무시된다.
  이렇듯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국의 대응은 상당히 신속하고 짜임새 있는 것이었다. 마치 그것은 미리 준비되고 계획된 각본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연극의 한 장면과도 같았으며 또한 계획의 성공을 위한 조건은 기묘하리만치 매순간 맞아 떨어졌다.
  한편 우리는 이 과정에서 소련의 대응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합법적 지위가 회복될 때까지 안보리에 참가하지 않고 있던 소련이 미국의 개입과정에 전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련의 사주에 의한 남침이라고 배운 우리에겐 매우 당혹스런 부분이라 하겠다.
  우리가 배운 것이 사실이라면 UN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소련은 UN안보리에서 미국의 조치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을 것이다.

  Ⅲ. 미-이승만의 반민족행위
  또한 이 와중에 미국의 전쟁 개입의도에 부합되는 조치가 미국과 이승만정권 사이에 이뤄진다. 이는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이 얻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나를 알 수 있는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50년 7월 이루어진 이른바 대전협정을 비롯한 일련의 한ㆍ미간의 밀약 및 협정이다.
  한국부대에 군사고문을 통한 통수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미국은 마침내 이승만과 맥아더가 서신을 교환하는 형식으로 해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UN군(엄밀히 말하면 미군)에게 이양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한국군은 귀하 휘하에서 복무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입니다’라고 하는 한편 맥아더는 이에 대한 회답에서 ‘국군을 본인 휘하에 두게 된 것을 진실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으로 이른바 대전협정이 이루어졌다.
  조약이나 협정에 의해 성문화된 것도 아니고 국회의 비준을 얻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곧바로 50년 7월17일부터 실시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미국은 이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의 행정권까지도 장악해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50년 7월31일 UN안보리에서 결정한 ‘한국 민간인 구호ㆍ원조에 대한 결정’이다. 이 결정에 따라 미국은 UN사령부산하에 UN군 인사처를 두고 그 산하기관을 서울, 인천, 부산 등 주요도시와 작전기구에 설치했다. 이에 의해 산업운용 외에도 식량에 관한 통제, 교육문화에 대한 감독, 심지어 거주이동과 승차권 발행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정권을 직접 행사했다.
  이뿐만 아니라 주한미군에 대한 치외법권을 보장하는 조치가 다음과 같은 사항에 의해 취해졌다. ①미국 군법회의가 주한미군과 그 구성원에 대한 형사재판권을 행사한다. ②한국인이 미군 및 그 구성원에 가해행위를 범했을 때는 그 한국인을 미군이 구속한다. ③주한미군은 미군이외의 어떠한 기관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한국전쟁과정 중에 이미 미국은 한국전쟁의 한 당사자로서 최고의 지위와 권한을 갖게 되었고 남한은 국군 통수권과 사법권 등 핵심적인 주권의 상당부분을 미국에 넘겨줌으로써 스스로 독립국가로서의 존립근거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들의 만행은 단지 주권침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북한동포 뿐 아니라 남한 동포에 대한 약탈과 강간, 2차 대전보다 더 많은 폭탄을 투하하고 38선 돌파이후 계속 추진된 핵폭탄투하계획(이는 이후 중국 대륙에 대한 전면적인 포고와 아울러 제3차 대전을 예고하는 것이다).
  7인의 중립적인 과학자로 구성된 국제과학조사단도 인정한 세균전 등이 있다. 또한 국방군에 의해 저질러진 신천과 거창에서의 대량학살사건 등 이러한 만행은 과연 미ㆍ이승만정권이 전쟁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나를 생각게 한다.

  Ⅵ. 중공군의 참전
  한국전쟁발발 전 불과 1년 전에 국가를 세운 중국은 계속된 혁명투쟁과 건설의 과업만으로 벅찼기 때문에 한국전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면 무엇이 중국을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했는가? 그 이유는 명백하다. 직접적으로 자국방위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전략에서 장개석정권에 굳건한 신임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는 모택동과 중국 민중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따라서 미국은 장개석 정권과 중국본토의 회복, 또는 최소한 대만만이라도 구해야 하는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이 구도를 한국전쟁에 실현시키고자 한 것이다. 미국은 전쟁발발직후 대만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하고 필리핀내의 미군사력을 증강시키고 베트남에 있는 프랑스에 대한 군사원조를 대폭 강화하였다.
  이러한 위협은 중국을 더욱더 위축시켰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은 전쟁이 한반도내에 국한되어지고 한국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압록강까지 북진한 미군은 압록강철교를 폭파시킴과 아울러 미공군기들이 만주지역을 폭격하여 중국민간인이 다수 살상되었다. 또한 트루먼, 국무장관, 국방장관, 맥아더 등 최고지도자들은 만주지역에 대한 폭격을 가상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전쟁개입은 최초의 38선 원상회복에서 시작하여 38선 돌파 만주폭격이라는 단계적 확대과정을 거치게 되었고 중국은 한국전에 대한 참전은 자국영토가 직접적인 공격대상으로 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점이 미국의 개입과 서로 다른 측면일 것이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미약하나마 중공군 개입까지의 과정을 통해 한국전쟁의 주요한 대목을 살펴보았다. 전쟁의 발발과정, 미국의 개입과 그들의 정책 등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최소한 다음과 같은 점은 정리해 낼 수 있으리라.
  전쟁의 시작은 미국의 세계전략과 그의 대한반도 이행과정으로서의 측면, 점증되는 전쟁의 위협과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그들 표현에 의하면 조국해방전쟁으로의 전화)하고자한 북한의 전략, 또한 취약한 지배구도의 공고화를 위한 이승만의 구도, 이 모든 요소의 결합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전쟁전후 과정에서의 제사건들은 한국전쟁의 성격과 전쟁주체들의 지향점 등을 뚜렷이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한반도 민중은 전쟁에 어떠한 입장과 참여를 하였는가, 전쟁종결 전후의 과정인 휴전회담과 제네바회담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또한 전쟁 중 양측의 점령지역에서 각자 어떠한 정책을 수행하였는가 등을 통해 더욱더 명확해질 것이다. 이 부분은 앞으로의 연구과제가 될 것이며 지면상 다음기회에 다루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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