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적전통 굳어져 해외유학생 속출, 연구에 새 방법론도입

  ‘山間(산간)에서 社會(사회)로’라는 일종의 코페르니쿠스的(적) 전환을 선언한 한국 불교계는 새로운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불교를 모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구체적인 하나의 표현은 근대적인 불교교육기관의 설립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분교의 前身(전신)인 明進學校(명진학교)의 개교가 그것이었다. 이후 시대적인 상황과 여건에 따라 佛敎師範學校(불교사범학교)(1910년) 佛敎高等講塾(불교고등강숙)(1913년) 佛敎中央學校(불교중앙학교)(1915년) 中央佛敎專修學校(중앙불교전수학교)(1928년) 中央佛敎專門學校(중앙불교전문학교)(1930년) 등으로 명칭과 그 내용을 바꾸면서 끊임없이 불교교육과 불교학연구를 진행시켰다.
  불교계에서 자기각성을 외치고 사회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던 사회참여의 구호는 구호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학교발전이란 사실과 함께 그곳에서 활동한 수많은 人士(인사)들의 사상과 學的(학적) 結實(결실)이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곧 여기서 우리는 동국의 불교학의 아카데미즘의 출발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출발을 退耕(퇴경) 權相老博士(권상로박사)와 安震湖(안진호)선생에게 들 수 있다.그들은 우리가 기억하는 최초의 명진학교 출신으로 근세 우리 불교학계를 거의 리드하다시피 활동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權相老博士(권상로박사)의 활동은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을만치 독보적인 것이었고 안진호선생의 역할 역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러한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또한 학교발전에 따른 불교교육내용의 발달을 고려치 않을 수가 없다. 1910년 불교사범으로 승격되었을 때 종래의 강원중심적인 교과과정은 신학문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어 소위 역사 地理(지리) 算術(산술) 등의 과목을 개설케 되었고 불교고등강숙을 거쳐 중앙학립과 종앙불교전수학교에 이르렀을 때는 오늘의 교과내용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되었다.

  교과내용의 다양성이나 內的(내적)인 충실은 시대사조에 따른 자연발생적인 발전과정은 아니었다. 중앙학림학장이었던 姜大蓮師(강대연사)나 朴漢永師(박한영사)의 끊임없는 노력과 현대적인 불교학에 대한 안목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불교교육과정의 새로운 변화는 불교연구에 새로운 국면을 가져다주었으며 한편 쇄국정책과 일제의 침략은 많은 사람들의 기선을 해외로 돌리게 하였고 그에 따라 불교계에도 해외유학이라는 새로운 경향을 나타나게 했다.
  1920년 본교총장을 지낸 白性郁(백성욱)박사와 金法麟博士(김법린박사)와 같은 분은 中央學林(중앙학림)을 졸업하자 각기 독일과 불란서로 유학을 갔고 金泰治(김태치)씨 같은 분은 日本(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들이 고국에 돌아왔을 때 불교연구는 현대적인 관점과 방법론에 입각해 있었다. 그리하여 1925년 白性郁(백성욱)박사는 ‘近時佛敎運動(근시불교운동)에 대하여’라는 論題(논제)아래 西歐(서구)의 불교운동과 그 연구동향을 소개하고 있다. 영국왕실 아세아학회의 ‘파리’연구회, 불란서 아세아학회 ‘파리’연구회들의 업적과 또한 서구에 있어서의 동양종교 신앙단체의 활동을 상세히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학계에 자극을 주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1928년 파리대학에서 돌아온 金法麟(김법린)박사의 활동 역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는 佛敎誌(불교지)에 불란서哲學(철학)의 비조인 데깔뜨에 대한 소개와 함께 ‘歐美學界(구미학계)와 佛典硏究(불전연구)’란 글을 통해 불교연구방법론과 그 광범위한 성과들을 알려주고 있다.
  아마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불교소식 외에 이것이 실제적인 소개가 아니었던가 한다. 그는 지금도 계속하여 강조되고 있는 ‘파알리ㆍ싼스크릿’원전을 통한 연구의 필요성을 말하며 그 현황을 소개하고 있으니 ‘Eㆍ뷔르누프’의 ‘Essni sur Le Pail', 'Vㆍ파우스뮐’의 파알리 ‘文(문)’法句經(법구경경) ‘Rㆍ대빗즈’의 ‘Pali Text society’를 통한 원전연구와 ‘케른’ ‘올덴버그’ ‘스나르’ ‘스젤밧츠끼’ ‘드ㆍ라ㆍ발레ㆍ뿌쌩’ ‘발레저’ 등의 불교교리와 불교연사에 대한 저술의 소개가 그것이었다.

  이들과 함께 中央學林(중앙학림)을 졸업한 金泰治(김태치)씨는 동경에 있으면서 불교지를 통해 계속하여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1926년 ‘불교와 사회사업의 발달’이란 논문에서 그는 일종의 불교학의 응용을 시도하고 있으며 뒤이어 1927년에는 ‘종교와 사회사업 발달연구’를 연재하면서 불교의 無償行爲的(무상행위적)인 보시정신이야말로 사회사업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곧 그는 사회인과속에서의 불교의 역할과 기능을 중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 불교 전수학교의 社會問題(사회문제) 및 社會事業(사회사업)이란 과목도 그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당시 빈번히 문제시되던 ‘불교의 경제관’이나 ‘불교의 윤리관’과 같은 관점들과도 연관을 갖는 것이었다.
  外部(외부)의 영향과 발을 맞추어 國內(국내)에서도 계속 論著述(논저술)이 나오고 있었다. 權相老(권상로)박사의 ‘조선불교약사’는 이미 1917년대에 나온 것으로 李能和(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와 함께 한국불교사의 쌍벽을 이루는 것이었지만 1930년에 그는 朝鮮佛敎史(조선불교사)를 발표하고 있다. 또한 1937년에 나온 그의 朝鮮宗敎史(조선종교사)는 당시 우리 學界(학계)로서는 주목할 만한 著述(저술)이었다.
  그는 여기서 宗敎學(종교학)의 입장에 서서 民俗學(민속학), 考古學(고고학), 言語學(언어학)을 통한 宗敎史(종교사)를 쓰고 있으니 그것은 前代(전대)의 ‘헤겔’的(적)인 思辨(사변) 위주의 종교사를 지양한 객관적인 종교현상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의 활동은 대표적인 이 몇 개의 著述(저술)에 그치지 않고 朝鮮佛敎月報(조선불교월보), 佛敎誌(불교지) 등의 편집인으로 時事的(시사적)인 글들도 항상 쓰고 있었다.

  한편 中央佛傳(중앙불전) 교장으로 있던 金敬注氏(김경주씨)의 ‘華嚴哲學(화엄철학)의 내용’이 1927년에 나왔고 이에 앞서 1924년 白性郁(백성욱)박사의 學位論文(학위논문)인 ‘佛敎純全哲學(불교순전철학)’의 발췌된 내용이 불교지에 연재되었다. 그것은 서양철학의 분석적인 體系(체계)에 대해 동양철학의 분석적 성격을 제시하는 것이었으니 불교의 스콜라(Scola)的(적)인 성격을 띤 아비달마불교에 대한 연구이었다. 이후 계속되어 발표된 논문들은 1930年代(년대)를 기점으로 1940年代(년대)로 내려오면서 상당히 풍부하여 졌다.
  許永鎬(허영호)교수의 般若心經(반야심경)에 대한 楚(초)ㆍ漢本(한본)에 의거한 연구 能斷金剛般若波羅經(능단금강반야바라경)의 楚(초)ㆍ漢對譯(한대역) 十二門論(십이문론)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 天台四敎儀(천태사교의) 등의 헌대어역이 나타났다. 특히 대승기신론이나 天臺四敎儀(천대사교의) 번역이 1940년대에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높이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의 경우 최근 趙明基博士(조명기박사)의 ‘新羅佛敎(신라불교)의 理念(이념)과 歷史(역사)’에 실린 元曉硏究(원효연구)에 이르러 비로소 本格的(본격적)으로 재평가 연구되어 거의 20년이나 앞선 기초적인 作業(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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