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역경원의 한글대장경

비유와 우화 엮어
부처님의 인격과 교훈 풀이한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는 문학작품

  출요경은 여러 가지 비유와 우화로 재미있게 엮어진 경전이다. 그리고 일반대중의 취미에 알맞도록 꾸며진 의도가 짙게 엿보이는 문학적 작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경전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전기만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에 구애됨이 없이 초역사적 신화까지 導入(도입)하여 창작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경전에서 華嚴(화엄), 法華(법화), 般若(반야)의 대승경전처럼 심오한 철학적 사상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그 대신 누구나 흥미를 느끼며 읽을 수 있도록 많은 비유를 들어가며 부처님의 위대한 인격과 교훈을 풀이하여주고 있음을 본다.
  한 사람의 위대한 종교적 천재이며, 지도자인 부처님의 고매한 인격과 뜻 깊은 교훈을 일상적 언어로는 그 眞面目(진면목)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원시경전 편찬자들은 <비유의 妙法(묘법)>을 창안하여 냈다. 이 비유(Avadana)를 경전 주석가들은 <了知(요지)의 法(법)으로서 未了知(미요지)의 法(법)을 밝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大智論(대지론)은 <世間(세간)과 相似(상사)한 柔軟淺語(유연천어)>라 하고 瑜伽論(유가론)은 <비유에 의하므로 隱義明瞭(은의명료)하다>고 주석하고 있다. 그러니까 未完成(미완성)인 相對的(상대적) 일상언어의 限界(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未了知(미요지)의 진리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비유를 창안하여 냈다는 말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를 표현할 때 그저 한량없이 많다고 하기보다는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많다는 표현이 알기 쉽다. 숫자의 많고 적음을 표현하는 단순한 경우에도 비유가 이해를 도와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요경은 모든 비유와 우화의 素材(소재)를 유명한 法句經(법구경)에서 얻고 있다. 법구경은 여러 가지 원시경전 가운데서 가장 교훈적인 훌륭한 구절만을 뽑아서, 한데 엮어놓은 ‘앤솔로저’ 즉 名句選集(명구선집)이다. 법구경의 교훈적 구절을 주석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이 경에서는 많은 이야기를 비유로 들고 있는 것이다. 많은 이야기는 주로 부처님의 本生譚(본생담)과 傳記(전기), 그리고 因緣談(인연담)으로 되어 있다.

  지루하고 어둔 밤
  이제 출요경의 본문을 훑어가며 그 비유가 재미있으면서도 교훈적인 것을 골라 적어보고자 한다. ‘깨어있는 이에게 밤은 길고, 지쳐있는 자에겐 지척도 천리다. 바른 길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윤회는 길다.’ 이것은 법구경 愚闇品(우암품)에 있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 대하여 출요경 無常品(무상품)은 부처님의 金口(금구)를 통하여 다음 같은 이야기를 비유로 들고 있다.
  옛날, 부처님들은 슈라아바스티ㆍ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밤에 자지 못한 사람은 적고 깨어있는 사람은 오히려 많다. 이들을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여자가 사내 생각을 일으키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있는 일이 많다. 또, 남자가 계집 생각을 일으키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있는 수가 많다. 셋째는 도적이다. 도적은 밤에 자지 않고 항상 깨어있다. 넷째로 성실한 비구는 항상 精進(정진)하고 있기 때문에 밤에 자는 일이 없고 언제나 깨어 있다. 사내 생각에 잠긴 여자와, 계집 생각에 잠긴 남자와 도적들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밤은 지루하도록 길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正法(정법)을 수행하는 비구들은 밤이 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지쳐있는 자연적 지척도 멀다. 그리고 바른 길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죽음과 삶의 윤회는 길다.”

  獨子(독자)를 잃은 과부
  역시 부처님이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실 때 일이다.
  어떤 과부가 사랑하던 遺腹子(유복자)를 잃었다. 그 아들 하나만 믿고 의지하며 살아왔던 과부의 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슬픔과 설움에 겨워 반쯤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밥맛을 잃은 다음 밤에는 자지도 않고 그저 앉으나 서나 죽은 아들 생각뿐이다. 때로는 저도 모르게 아들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며 거리로 뛰어나가기까지 하였다.
  그만큼 과부의 설움은 컸던 것이다. 마침 이 과부는 성 밖 祗園精舍(지원정사)에 한 위대한 성자가 있어 그를 친견하고 그의 말씀만 들어도 모든 근심과 설움은 깨끗이 사라진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과부는 곧 그 성자를 찾아갔다. 물론 이 성자가 바로 부처님이다.
  부처님을 만난 과부는 “자기는 하나밖에 없는 유복자를 잃고 도무지 설움에 겨워 미칠 지경이라”고 말하면서 그녀의 슬픔을 잊어버리는 방법을 가르쳐줄 것을 간청하였다. 조용히 듣고 계시던 부처님은 과부에게 일렀다.
  “곧 성 안으로 들어가서 죽어본 적이 없는 집을 찾아 불씨를 얻어가지고 오라. 그러면 설움을 잊게 하겠노라.”
  그 과부는 기뻐하며 곧 성 안으로 들어갔다. 집집마다 찾아가 알아보았더니 사람이 죽어본 적이 없는 집은 하나도 없었다. 실망한 과부는 불씨 하나 얻지 못하고 의기소침하여 부처님 앞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사람이 죽어 본 적이 없는 집은 하나도 없더라”고 아뢰었다.
  그때 부처님은 과부를 향하여 엄숙히 말씀하셨다. “대개 이 세상에 살고자 하면 네 가지 인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네 가지란 첫째, 항상 한 것은 반드시 무상하고 둘째 富貴(부귀)한 자는 반드시 貧賤(빈천)하여지고 셋째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되고 넷째 아무리 건강하여도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설법을 듣고 과부는 깊이 깨달은 바가 있었다.
  네 가지 因緣(인연)을 설명하기 위하여 출요경은 부처님과 아들을 잃은 과부의 대화를 등장시켰다. 살았으면 반드시 죽게 마련이라는 절대 진리를 슬픔에 잠긴 과부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부처님은 <常(상)과 無常(무상)>, <富貴(부귀)와 貧賤(빈천)>, <만남과 이별>의 相卽(상즉)관계를 빌어 왔다.
  꽃은 피면 지게 마련이고 權勢(권세)도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權不十年(권불십년)이란 말이 있다. 榮枯(영고)와 盛衰(성쇠)는 비단 자연계에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고, 인간계에도 적용되는 현상이다.
  그리고 만남과 이별의 인연 관계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만날 때는 다시 헤어질 것 같지가 않지만 얼마 안 가서 반드시 헤어지게 되는 것이다. 헤어진다는 것이 悲劇(비극)을 의미한다면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난다는 시간이 벌써 비극의 시작이다.
  이 관계를 부처님은 <會者定離(회자정리)>의 한 마디로 言表(언표)하였다. 만났으면 갈라지게 마련이란 뜻이다.
  마찬가지로 살아있으면 죽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정말 確固不動(확고부동)한 절대 진리가 있다면 <인간은 한번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다>는 사실밖에 없다. 죽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인간이 죽어서 化(화)한 귀신이거나 도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지금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 생각하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 살다가 죽는가 하는 그 <언제의 시간>이 문제가 된다. 이 언제의 시간이 과부의 아들에게는 좀 일찍 찾아왔다는 차이뿐이다. 이 이치를 부처님은 知慧(지혜)의 입을 통하여 과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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