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이여, 권리 앞에 당당해지자!

 
19세기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은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법의 목적은 평화이나, 그 수단은 투쟁이다”고 언명했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아무도 권리를 주지 않는다. 타인의 자비나 절대적 존재의 가호를 기대할 수는 있지만, 나만이 나의 내일을 만들 수 있다. 자신의 권리에 대해 눈감지 말자. 그것이 냉정한 진실과 가혹한 현실에 대처하는 길이다.

진실은 언제나 냉정하고 현실은 가혹하다. 우리는 진실을 알고 현실에 대처하는 힘을 얻기 위해 교육에 의지한다. 교육은 문명의 상징이며, 인류를 이만한 수준으로 끌고 온 것은 전적으로 그의 성과이다. 교육의 실패는 인간 역사를 문명 이전으로 되돌릴 것이다.

우리는 선동이 교육을 대신하고, 야만이 지성을 파괴함으로써 인류가 쌓아온 전진의 흔적을 지우려는 시도를 보아 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현대사의 곳곳에서 독재와 독선의 추악한 자취들을 확인할 수 있다. 보편적 교육을 거부하고 교육을 통해 왜곡된 이념을 주입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해 왔다. 걸음은 느리지만 언젠가는 지금의 이상이 현실로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을 믿어야 한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대학교육, 특히 등록금 문제가 서서히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 대선 때 반값등록금 공약은 선거를 이기기 위한 정치적 허사에 불과했다는 당사자의 자백을 들은 바 있다. 그런데도 정치는 다시 반값등록금을 들고 나왔다. 왜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대학생들을 무기력하고 정치적 무지에 빠졌거나 현실적인 힘이 없다고 보는 증거는 아닐까.

현재 대학등록금 문제는 우리 뿐 아니라 세계적인 이슈이다. 캐나다와 미국, 영국과 독일, 남미의 칠레에까지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투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등록금 인상을 거부한 뉴욕공립대학 학생들은 “등록금 인상은 전쟁이며, 우리는 반드시 보복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들의 저항에 비하면 우리 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잠깐 거리로 나섰던 일은 순진해 보인다. 저들은 그야말로 정책 당국자들과 극단적인 전쟁을 불사했고 그 대부분은 이겼다. 그것도 우리 대학의 등록금 보다 훨씬 낮은 데도 그랬다.

현재 우리나라 대학의 등록금 수준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미국 대학의 70퍼센트 이상이 공립인 것을 감안하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등록금을 지불하고 있다. 프랑스는 고등학생까지 거리에 나섰던 68투쟁의 결과로 대학의 국유화가 진행됐고, 대부분의 유럽대학들은 무상교육이다. 인상안에 격렬한 저항을 불렀던 독일 대학의 등록금은 대략 70만 원 정도이니, 과연 그들이 잘못됐는지 우리의 제도가 이상이 있는 것인지를 의심해 봐야 한다.

최근의 통계를 보면 대학졸업자가 전체 성인의 절반을 넘었고, 고등학교 졸업생 열 명 중 여덟은 대학에 진학한다. 대학졸업이 취업의 필수조건이 된 현실은 등록금을 생계비의 범주로 취급해야 한다는 주장도 불러냈다. 그런 판국에 반값등록금 주장을 두고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정치적 선동도 등장했다. 등록금 인하를 주장한 단체는 국정원의 압수수색을 받고, 언론은 대학생의 등록금 인하 주장을 좌파 정치세력과 연루된 것이라 주장한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기 위한 정책 논리에는 귀를 닫았다. 여러 분석에 따르면 매년 6조 원 가량을 투자하면 당장 반값등록금을 실현할 수 있다. 국가 전체 예산의 2퍼센트를 약간 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조차 부담할 수 없는 취약한 국가시스템을 가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서 대학들은 등록금을 받아 10조원의 현금을 적립금으로 쌓아 놓고 있다. 시설 증축 등을 빌미로 삼지만 많은 이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다. 교육에 직접 필요한 돈 외에 재단의 투자가 필요한 부분도 학생들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행마저 투명하지 않다.

대학등록금 수준에 맞는 최고의 교육인지도 의심할 필요가 있다. 취업을 위해 대학 교육만으로는 부족하여 어학연수를 가고 사교육 시장에서 필요한 내용을 보충해야 한다. 그 비싼 등록금만으로도 부족한 것이다. 모든 준비를 마쳤다 하여 졸업 후 취업이 쉬운 것도 아니다. 더 험난하고 냉정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 정의(正義)란 ‘모두가 공정한 규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규칙이 공정하지 않다면 부정의한 세상이다. 적어도 대학등록금에 관한한 우리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살고 있다. 현재 우리 대학의 대부분은 사학(私學)기관이고 사학법의 관리감독을 받도록 되어있다. 몇 해 전 사학비리가 터지자 법을 개정하려 하였으나 사학과 관련 있는 정치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맞았다. 현재 유력한 어느 대선후보도 사학법 개정을 반대하며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규칙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이들이 규칙을 제정하고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규칙을 왜곡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파괴이다.

이미 부정의한 현상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특정대학에 특정지역 출신의 진학이 두드러지게 높아지고, 부모의 소득에 따른 진학 대학의 편차도 보이고 있다. 교육의 대물림을 통한 부의 대물림현상도 눈에 띄고 있다. 학자금 대출을 못 갚아 신용불량으로 내몰리는 이들도 나날이 늘고 있다. 이제는 사회적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수준이 됐다.

권력과 정치인 또는 대학재단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19세기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은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법의 목적은 평화이나, 그 수단은 투쟁이다”고 언명했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아무도 권리를 주지 않는다. 인간의 문제에 있어 한 가지 자명한 사실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자신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자비나 절대적 존재의 가호를 기대할 수는 있지만, 나만이 나의 내일을 만들 수 있다. 자신의 권리에 대해 눈감지 말자. 그것이 냉정한 진실과 가혹한 현실에 대처하는 길이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