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그 기원을 찾아서 <보론2>

중공군 개입 후~휴전까지
미군의 세균살포…‘국제조사단’이 증명
반공포로의 석방… 제네바협정에 위반

  Ⅰ. 들어가는 말
  되돌아볼 때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은 국내외 학계의 연구동향과 국내 젊은 세대사이에서 분단현실을 극복하겠다는 민족자주의식의 고양과 이어지면서 변화되어 왔다. 그러므로 보다 사실적이고 총체적인 한국전쟁의 이해는 통일운동을 주도해나가야 할 세대들에게 부여된 하나의 역사적인 과업인 것이다. 이에 필자는 민족통일운동에 조금이나마 일조하고자 민족의 분단을 고착화시키고 정치, 경제, 군사적 대미 종속화를 규정짓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전쟁의 실제 진행과정을 살펴보았다.
  전쟁과정에서의 제사건들은 전쟁의 성격과 전쟁주체들의 이해와 요구 등을 더욱 뚜렷이 해주기 때문에 지난 호에 게재된 내용(전쟁발발직후부터 중국군의 개입까지)에 이어 51년 이후의 미군과 유엔군의 무자비한 몰살작전, 세균전으로부터 휴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자한다.

  Ⅱ. 몰살작전과 세균전
  51년 이후의 미군과 유엔군의 무자비한 몰살작전과 세균전은 한국전쟁이 한반도에 국한된 국지전적 성격을 훨씬 넘어 중국대륙에까지 확대할 것을 고려함으로써 3차 대전의 발발위험성을 크게 내포하는 국면으로 만든다.
  자신의 판단과는 달리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자 맥아더-델레스로 이어지는 미공화당 강경파들은 전쟁확대론을 내세워 압록강을 넘어 전쟁을 확대시키는 한편 핵무기의 사용을 포함한 공중폭격, 장제스 국민당정부군의 본토상륙, 중국해안 봉쇄 등을 적극 주장했다. 맥아더는 자신의 계획을 ‘교살작전’이라는 이름하에 보다 구체화시켰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공군의 보급선을 격파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둘째, 그러기위해서 우선 넓은 지역에 대해서 끊임없이 한정공격을 속행하고, 서울선을 탈환하여 장래의 작전기지로 한다.
  셋째, 다음으로 북한전역에 대공습을 가하여 적의 후방을 분쇄한다. 압록강 이북의 적 또는 다리의 공격이 허용되지 않는 경우는 방사성 폐기물을 적의 보급로에 살포하여 한국과 만주를 차단한다.
  넷째, 허용된다면 국부군(대만군)을 사용하여 미군의 지원 아래 북한의 북쪽 끝인 동서해안에 상륙, 공수작전을 동시에 행하여 적을 커다란 함정에 몰아넣는다.

  그러나 맥아더의 이와 같은 전쟁확대론은 영국 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고 또 소련의 전쟁개입으로 인한 세계대전으로의 확대를 우려한 미국정부에 의해 저지되었다. 마침내 맥아더는 유엔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1951년 4월11일) 미국의 한반도 정책도 미국영향 아래서의 통일노선으로부터 교섭에 의한 전쟁종결노선으로 바뀌어 휴전교섭이 본격화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뚜렷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전쟁을 종결짓는다는 것은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미국은 북한전역에 무자비한 폭격을 가하게 되고 세균병기를 살포한다. 미국은 세균전 운운은 단순한 날조에 불과하며 ‘북한과 화북의 전염병은 그 지역의 원시적 생활조건, 불결한 위생시설, 불충분한 의료의 결과’라고 반박하였지만 1952년 6월 오슬로에서 개최된 세계평화회의의 집행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7인의 중립적인 과학자로 구성된 국제과학 조사단이 발족하게 되고 연구결과의 최종결론을 내렸다.
  “본 조사단은 결론으로서 미공군은 일본군이 제2차 대전 중에 장티푸스를 퍼뜨리기 위해 사용한 것과 정확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동조사단의 의견으로는 장티푸스에 감염된 쥐가 비행기로부터 낙화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미공군이 세균전을 자행한 것은 미국이 한국에서의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북한과 중국에 대해 계속 위협을 가함으로써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의도였음이 명백해졌다.

  Ⅲ. 유격전과 민중의 입장
  미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함에 따라 북한군은 장기항전 태세로 돌입하게 되었고 일부는 계속 남한지역에 남아 유격전을 벌였다.
  험준한 지리산 일대를 거점으로 하고 노령산맥의 이동무대로 미국과 이승만 정부에 대항하며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미국과 이승만 정부는 유격대의 토벌을 위해 새로 육군 제11사단 창설, 남원에 사단본부를, 전주에 제13연대, 광주에 제20연대, 진주에 제9연대를 미군이 38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감행한 직후인 10월 초엽에 각각 배치했다. 그러나 대규모의 군대투입에도 불구하고 유격대의 토벌은 용이하지 않았다. 유격대란 본시 민중의 지원 없이는 전투는 차치하고 생존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유격대가 상당한 세력과 전투력을 지니고 싸운다는 것은 지역 내, 민중과의 협력 정도를 드러내는 징표라 할 수 있다. 유격대의 진군으로 인하여 미국과 이승만정부는 심각한 불안에 쌓이게 되고 드디어는 집단학살의 참극을 벌였다. 1951년 2월초 거창 함양 산청 등 지리산 남부지역의 유격대를 토벌하기 위하여 제11사단 제9연대는 합동작전에 돌입하였다.
  ㆍ작전 지역 내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
  ㆍ공비(유격대)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
  ㆍ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한 경우는 소각하라.

  위의 합동작전 명령지침은 결국은 지역 주민과 그들의 생활터전을 말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미군들이 선보인 몰살작전을 계승한 유격대 토벌계획은 그대로 실행에 옮겨졌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유격대와 민중간의 혈연적 운명관계를 더욱 분명히 해주고 자신들의 토벌작전은 더욱 반민중적인 수렁으로 빠뜨리고야 말았다.
  대표적인 집단학살극은 거창군 신원면에서 빚어졌는데 토벌군은 마을주민 8백~1천여명을 과정리 소재 신원국민학교에 집단 수용시켜 놓은 뒤 다음날 이들 주민 중에서 군인 및 경찰의 가족, 유지급 인사 및 가족만을 골라낸 뒤 나머지 주민을 집단학살한 후 시체는 휘발유에 끼얹어 불태워 버렸다. 무려 6백여명이 넘는 숫자였다.
  그리고 토벌군은 학살된 사람의 숫자를 1백87명으로 줄이고, 대상 또한 모두가 공비 및 공비와 내통한 분자라는 허위보고를 연대에 올렸다. 그러나 사건의 진실은 결코 은폐될 수 없었다.
  학살의 진상은 급속도로 전지역으로 퍼져나갔고 그와 함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아 올랐다. 결국, 이승만 정권은 사건의 주모자였던 신성모를 해임하고 살인주범들 중 극히 재판하지만 복역 1년만에 모두를 석방시켜 경찰교위간부로 다시 기용하였다.

  Ⅳ. 전쟁 중의 남과 북
  전쟁은 전쟁직전 15만을 약간 웃돌던 남한의 군사력을 전쟁 중 70만명으로 증강시켰고 전후 60만 대군의 병력을 제도화하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전쟁은 일제시대의 수탈과 더불어 내전에 가까운 정치적 혼란을 통해 이미 피폐된 경제를 완전히 황폐시키고 말았고, 그로 말미암아 대미 의존적인 경제구조를 심화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들은 이승만의 독재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붕괴직전의 이승만 정권이 되살아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북한에 있어서 전쟁은 새로운 질서를 추구해온 그동안의 북한사회에 가혹한 시련을 안겨다 주었으며 그 과정을 통해 더욱 단련시키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세계최강의 미국과 정면으로 맞부딪치게 된 북한의 내부사정은 곤란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뿐더러 전쟁분위기를 틈탄 각종부패와 낭비풍조, 정권기관 내에서의 관료주의가 심심치 않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에 파괴된 정치질서를 복원하고 전쟁수행에 필요한 역량동원을 효과적으로 보장하고자 북한당국은 1952년 초 봄에 반관료주의, 반탐오, 반낭비운동을 선언했으며, 혼란에 빠진 각종 조직을 재건하고 이를 통해 정부와 일반주민의 결합을 강화하는 것에 주된 목적을 두며 북한전역에 약 5천여개의 민주선전실은 1951년부터 설치, 사업을 벌여나갔다.
  이러한 전쟁과정에서 북한에서의 김일성의 지도력은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해졌고 확고한 기반을 갖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은 남과 북의 분단을 고착화 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역사적인 대사건이 되었던 것이다.

  Ⅴ. 휴전의 성립
  소련의 유엔대표 밀리크의 휴전제의를 미국측이 즉각 받아들임으로써 불과 15일만에 예비회담이 1951년 7월 개성에서 개최되고 곧이어 본 회의가 속개되었다.(7.10) 회담의 내용은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 경계선 설정문제, 휴전실시를 위한 감시기관 구성문제, 포로교환 문제 등이었다.
  미국측의 휴전 제의에 대해 이승만은 반대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한편 휴전 수락조건으로 중공군 철회, 북한의 무장해제, 유엔감시하의 총선거 등을 내놓았지만 채택되지 않았고,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측의 주도 아래 휴전회담은 진행되었다. 휴전회담의 의제 중 휴전선 문제는 공산군측이 38도선을 주장한데 반해 다소 북진하고 있던 유엔군측은 양군의 접촉선을 주장하여 맞섰으나 공산국측이 접촉선에 동의함으로써 타결되었고 (1951.10.31) 감시기관 문제도 유엔군측이 추천한 스웨덴, 스위스와 공산군측이 추천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4개국의 중립국 감시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합의되었다.
  그러나 휴전회담의 최대난관은 포로교환문제였다. 유엔군측이 제출한 북한군과 중공군의 포로수는 13만2천4백74명이었고 공산군측이 제출한 한국군 및 유엔군의 포로수는 1만1천5백59명이었는데 이들 포로들 중에는 송환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이 때문에 유엔군측은 포로 개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이동을 할 것을 주장했고 공산군측은 모든 포로가 그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맞섬으로써 회담이 난항에 빠졌다. 그러나 공산군측이 일단 포로들의 자유의사를 확인하는데 동의함으로써 회담이 속개되었다. 그러나 ‘자유의사’에 대한 불신성으로 인해 회담은 다시 중지되고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중단상태에 빠졌던 휴전회담이 미국에서의 정권교체, 소련에서의 스탈린의 죽음 등 국제정치적 변화를 겪고, 공산군측의 회담재개제안과 상병포로의 교환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재개되었다. (4.26) 그러나 휴전회담이 진전될수록 이승만 정권의 반대 운동도 격화되었다. 미국은 휴전 후 한국군을 20개 전투사단으로 육성하며 10억달러의 경제원조를 제공하고 ‘평화가 확립될 때까지 미국군이 한국 내에서, 혹은 그 주변에서 경계태세를 유지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워 이승만을 설득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에 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휴전회담에서 포로송환협정이 서명되자 유엔군과의 상의 없이 2만5천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휴전회담은 또 한 번 위기를 맞을 뻔했으나 미국측의 휴전을 위한 적극적인 자세와 공산군측의 동의로 마침내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휴전협정에서는 서명 후 3개월 이내에 한반도의 장래문제를 논의하는 정치회의를 열도록 규정했고, 한국과 미국은 한미안보조약(1953ㆍ8ㆍ7)의 공동서명에서 정치회의가 90일이 지나도록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로서의 역사적인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달성할 수 없을 경우’ 두 나라가 이 정치회의에서 함께 탈퇴하도록 약속했다.
  휴전협정에 따른 정치회의는 제네바에서 열렸으나(1954.4.26) 아무 성과 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제네바 협상회의가 결렬된 보다 큰 책임은 미국과 남한측에 있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미국과 남한은 애초부터 북한이 도저히 수락할 수 없는 통일방안을 제시함으로써 협상의 성공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와 인구비례에 의한 전한국위원회구성을 골자로 하는 통일방안의 제시는 협상자체를 봉쇄하는 것을 목적으로 그 이후에도 일관되게 지속되었다.

  Ⅵ. 맺음말
  사상 유례 없는 동족상잔이었던 한국전쟁의 비극은 남북한 민간인을 합쳐 2백4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낳은 인명피해의 규모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의 분단체제를 확립하고 우리의 현재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밖으로는 동서의 냉전을 격화시키는 하나의 고비가 되었고 미국과 일본의 강화조약 및 미ㆍ일의 안보체제를 재촉하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세계에 대하여 한국, 한반도에 대하여 보다 과학적 인식을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열쇠인 것이다.
  전쟁에 의해 백의민족은 유린당하고 학살되었으며 우리의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분단은 고착화되어 통일은 점점 요원한 것으로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전쟁의 역사적 진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왜 반전반핵 해야 하는지, 왜 반미 반독재를 외치며 민족해방통일운동을 가열차게 전개해야하는지를…
  아픈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과거에 연연하고자 함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함이다. 민족자주 평화의 가치이상을 바탕에 둔 시간 속에서의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은 민족의 평화통일을 하루라도 앞당기는데 이바지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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