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를 가다 ③-불교미술<마지막 회>

서안 흥교사…신라승원측의 사리탑 눈길끌어
돈황 막고굴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나와

  고대의 東西文化(동서문화)가 교류 접촉하던 길을 비단길, 이른바 실크로드라는 말로 상징하고 있다. 그리스ㆍ로마와 이란ㆍ인도의 서방문화가 서역ㆍ중국ㆍ한국 등 동방으로 들어오고, 동방의 문화가 서방으로 전파되던 교통로상에는 이들 문화가 교류접촉하면서 찬란하게 꽃피웠던 수많은 유적들이 혹은 땅속에 파묻히고 혹은 파괴된 채 아직도 옛 영광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리스 로마와 이란의 서방문화는 인도의 불교문화와 교류하여 간다라의 불교문화를 창조했고 이 국제화된 불교문화는 서역으로 중국으로 그리고 우리나라로 전파되면서 더욱 복잡 다양한 국제적 불교문화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실크로드상의 문화유적들은 당연히 불교문화유적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우리 동국대학교는 1985년부터 실크로드의 불교문화 유적 학술조사단을 구성하여 파키스탄의 간다라학술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로 ‘동서문화의 십자로 간다라를 가다’ 2권을 출간했으며 이어 인도학술조사를 일단 완료한 상태이다.

  그러나 실크로드의 꽃은 西域(서역)지방이다. 서역은 동서문화의 교류지이자 매개지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더러 동서문화가 교류접촉하면서 창조해낸 독특한 문화도 찬란히 꽃피웠던 곳이다. 이 서역지방은 역대를 통하여 인도의 영향권에 있었거나 독자적인 독립국을 형성했거나 중국이나 북방민족의 지배하에 있기도 한 복잡다단한 역사를 경험해왔으나 현재는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중국에 속해있다. 이 지역을 중국에서는 신강위굴자치구 (新疆自治區(신강자치구))라 하며 흔히 新疆省(신강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번 우리 동국대학교는 중국불교문화유적학술조사단을 구성(사학과 曺永祿(조영록), 불교학과 睦楨培(목정배), 지리교육과 邢基柱(형기주)교수, 筆者(필자))하여 KBS취재반과 합동으로 5월5일부터 6월5일까지 한 달 간에 걸쳐 실크로드상의 불교문화유적을 상세히 조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서안(西安)까지는 여러 사람이 다녀왔고 돈황까지도 몇 사람이 다녀왔지만 그 서쪽이 진짜 서역(西域)에 발을 디딘 것을 우리 조사단이 고대이후에는 처음이고, 특히 학술조사단으로서는 역사상 처음이어서 그 의의는 지대하지 않나 한다.
  여기서는 조사일정에 따라 조사하게 된 대표적인 불교문화유적을 간략하게 소개하는데 중점을 두고자 하며 상세한 것은 곧 출간된 보고서와 10월에 열리는 자료전시회를 그리고 9월13일부터 15일까지 3회에 걸쳐 방영되는 KBS1방송 西域紀行(서역기행) 3편 등을 참고해주기 바란다.

  1. 서안(西安)의 불교문화유적
  서안(西安)은 진ㆍ한(秦ㆍ漢)이래 역대의 수도로 가장 많이 활용되었던 천년고도(千年古都)로 지금의 장안(長安)이다. 특히 당나라 때는 실크로드를 통해 전해오는 서방의 문화를 위시해서 세계 각국의 문물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다시 이를 종합하여 재창조한 문화가 세계 각국으로 번져 나간 세계 최고의 국제도시였다.
  따라서 서안이야말로 실크로드의 중국쪽 종착지로 각광받았던 것이다. 이 서안에는 수많은 유적이 있었다. 특히 실크로드를 통한 불교문화의 전파와 직결된 유적들이 많이 있다. 현재 대안탑은 거대한 전탑인데 원래 대자은사(大慈恩寺)의 불탑이었고 인도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수많은 인도의 불경을 중국에서 번역해서 봉안했던 불탑이었으니 문화전파의 유명한 유적임이 분명하다. 이 역경사업을 주무했고 직접 실크로드를 왕복했던 현장 삼장법사의 사리가 봉안된 탑이 흥교사(興敎寺)인데 여기에는 현장의 제자이자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인 우리 신라의 원측법사(圓測法師) 사리탑도 있어서 우리의 주목을 유난히 끌었다.
  이외에 역시 역경장으로 유명한 소안탑ㆍ청룡사ㆍ화엄사 등은 실크로드와 지대하게 관련된 불적(佛蹟)이다.

  2. 난주(蘭州)
  이어서 우리는 난주로 갔다. 난주는 감숙성의 성도(省都)로 현재는 공업도시로 유명하나 옛날에는 서역으로 통하는 관문격이었다. 난주에서 서안쪽으로는 유명한 맥적산(麥積山) 석굴이 있고, 서쪽으로는 병영사(炳靈寺) 석굴이 있어서 동서문화의 교류를 실감나게 하는 곳이다. 난주에 도착한 이튿날 120km 떨어진 병영사 석굴을 찾았다. 병영사 석굴은 황하의 상류에 있는 유가협댐 호수의 끝부분 기암괴석이 총립한 절경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현재 180개의 석굴이 1천5백여년간 개착되어 776구의 불상이 조성 봉안되고 있다.
  맥적산 석굴은 보리를 쌓아놓은 듯한 기이한 암석이 우뚝 솟아있는 깎아지른 절벽을 뚫고 파서 수많은 불상과 벽화를 봉안하고 있다. 이들 석굴은 모두 인도ㆍ서역의 불교문화를 받아드리던 관문이자 매개지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하던 곳이었다.
  난주에서 특래열차를 타고 서북으로 한없이 달려 주천(酸泉)에 도착했다. 주천일대에는 진ㆍ한 때부터 흉노와 접전하던 서북변방이었고 한(漢)이 실크로드를 개척하던 최전선으로흉노를 격파해서 드디어 실크로드를 뚫었던 관문이기도 했다.
  만리장성의 종착 관문 가욕관도 있고, 위ㆍ진시대의 많은 벽화고분이며, 여러 석굴유적들까지 산재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진ㆍ한 이래의 만리장성의 토축이며, 명나라 때 축조된 가욕관과 그 일대의 장성은 장관을 이루고 있다.

  3. 돈황석굴(敦煌石窟)
  주천에서 하서회랑(河西廻廊)이라는 중국과 서역을 이어주는 유일한 기나긴 통로(通路)를 지나 돈황에 도착했다. 돈황(敦煌)은 서역과 그 너머 인도ㆍ이란ㆍ로마로 들어가는 중국쪽 창구였다.
  여기서는 실크로드 3대로(三大路)인 천산남로(天山南路) 천산북로 사막남로(沙漠南路) 등 세 길 가운데 어느 길로도 갈 수 있는 요충지이므로 실크로드상의 군사, 경제, 문화의 핵심도시로 각광받아왔던 것이다. 이처럼 실크로드 상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이어서 예부터 불교문화가 찬연히 꽃피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돈황 막고굴(莫高窟)이다. 이외에도 유림굴 등 많은 유적이 남아있지만 이 막고굴은 원래 1천년이상 1천여석굴이 조성되었고(잔존 492굴) 현재 2,500구의 불상, 1,045폭의 불화가 남아있어서 이 석굴사원의 위용을 짐작해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남아있는 풍부한 벽화와 불상들은 불교문화의 동서교류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중국미술사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증언하고 있을 뿐더러 우리나라 미술과도 관련성이 깊어 매우 주목되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서적들과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인류문화의 보고(寶庫)로 세계의 주목을 받아왔는데 우리 신라스님 혜초(慧超)가 남긴 3대 인도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이곳 장경동(藏經洞)에서 발견되어 우리선인들이 실크로드상의 문화교류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4. 투르판(高昌國(고창국))
  돈황에서 황막한 사막을 지나 서역(西域)의 중심지로 들어갔다. 서역 동쪽의 중심도시 투루판은 황막하기 짝이 없는 타크라마칸사막 가운데의 한 오아시스 도시이다. 오아시스를 중국말로는 綠州(녹주)이라 하는데 잿빛사막 가운데 푸른 점처럼 보이는 푸른 땅이라는 뜻이다. 우리일행이 머물렀던 호텔이 바로 오아시스호텔 이른바 綠州賓館(녹주빈관)인데 투루판에 어울리는 호텔이름이라고 수긍되었다. 이 투르판 시가를 중심으로 동서에 고창고성(高昌古城)과 교하고성(交河古城)이라는 두 옛 시가지가 자리 잡고 있다.
  이들 성은 옛 투루판국의 수도였고 이 지역을 통치했던 중심도시였으므로 수많은 불적(佛蹟)과 유적들이 남아있다. 고창성의 북쪽으로는 화염산과 천산이 전개되고 있는데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현장과 손오공의 얘기가 전개되던 현장이기도 하다. 불타고 있는 듯한 화염산 언저리에는 유명한 석굴이 세 곳이나 있는데 이 가운데 베제크리크석굴이 가장 유명하다. 계곡의 절벽을 파거나 흙벽들을 축조해서 만든 석굴로 우리나라 토함산 석굴의 시원을 보여주는 중요한 불적이며 이 벽면에 있던 벽화의 일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다.
  서역일대의 석굴이 다 마찬가지지만 서양열강과 일본의 약탈 때문에 참혹한 몰골로 변했지만 이곳 석굴은 대표적으로 수난을 입어 현재도 그 흔적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5. 쿠챠(庫車(고차))
  현대의 신도시 쿠알라를 거쳐 사막의 요충이자 비단길(천산남로)의 중앙부인 쿠챠로 갔다. 당나라 때 서역도호부(安西都諸府(안서도제부)) 설치되어 서역전체를 통치하던 서역의 중심도시였다. 원래의 쿠챠국 궁성은 번화하기 짝이 없었으며 불교사원들이 즐비하여 1백여개가 넘었고 승려는 5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작은 사막의 오아시스 왕국치고 대단한 번성이 아닐 수 없다. 신라의 혜초스님도 돌아오는 길에 이곳을 들려 불적(佛蹟)들을 순례하면서 기록을 남기고 있어서 당시의 번화한 쿠챠성의 실상을 알 수 있다. 이 성의 서문밖에는 유명한 30미터나 되는 거대한 입불상(立佛像)이 있었고, 절경의 기암괴석 암벽을 뚫어 만든 수백개의 석굴을 가진 키질석굴도 있으며, 쿰트라 석굴이나 쿠즈라가호석굴도 있다. 쿠챠강의 상류에도 소호리사원지가 거대한 유적으로 남아있는데 강을 사이에 두고 두 곳에 동서 소호리절이 전개된 것이다.
  현장스님도 놀라 찬탄해 마지않던 웅장한 대사원의 위용이 오늘날에는 흙더미의 폐허로 변해버려 무상의 진리를 증언해주고 있다.

  6. 우루무치 
  서역인 신강의 수도 우루무치는 현대에 완성된 신도시에서 옛유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주위로는 황량한 사막 속에 돌연히 전개된 몇몇 별천지가 있어서 관광지로 유명하다. 서양구라는 천산의 북록에 유명한 목장지대와 거대한 폭포수가 있고, 백두산 천지와 흡사한 우루무치 천지(天池)가 있어서 이곳 사막사람들의 낙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전 서역지방의 유적에서 출토된 중요한 유물들이 보관되어있는 이곳 신강박물관에 집중되었다. 실크로드의 상징인 비단과 불상, 금속공예들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7. 운강석굴
  우루무치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눈 덮인 신비의 천산을 내려다보면서 북경까지 직행 다시 대동시 교외의 운강석굴에 도착했다. 불교문화의 제1황금기로 회자되는 북위시대에 국력을 기울여 왕성인근에 조성한 석굴이어서 장엄한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석굴 안에는 수많은 불상과 불화들이 현란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이들은 돈황ㆍ병영사 석굴들을 조성한 사람들에 의하여 조성되어 당시 실크로드 문화의 중국쪽 종착지이자 종합 완성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어서 이번 실크로드 학술조사의 마감을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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