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전 소장
우리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드러내는 데에는 아직도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피해자들이 가장 먼저 받는 사회적 반응은 ‘혹시 유발하지 않았나?’, ‘좋아서 해놓고 이제와서 다른 소리하는 것 아닌가?’하는 의심의 시선이다.

작년에 발생한 고대 의대생 성폭력 사건의 처리과정은 이러한 문제를 총체적으로 보여주었다. 피해자는 학교측의 ‘무감각’으로 인해 가해 학생들과 한 교실에서 시험을 쳐야했고, 재판과정에서 피고인의 변호인은 이들의 동기를 증인으로 불러 난데없이 피해자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심문을 해 물의를 빚었다. 또한 피해자가 인격장애가 있다는 내용의 문서를 동료 학생들에게 뿌린 한 가해자와 그 어머니에게는 명예훼손으로 실형이 선고되기까지했다. 결과적으로 피해자는 고소과정을 거치면서 1차적인 성폭력 피해보다 더한 고통과 불이익을 겪어야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인권침해를 막기 위해 어떤 법적, 제도적 장치가 있는지를 살펴보자. 우리 형법은 ‘친절하게도’ 이러한 성폭력 피해의 특수성을 감안해 성폭력 범죄를 친고죄로 규정하고 있다. 즉, 피해자나 고소권자의 고소가 있어야 벌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이 규정은 원래 성폭력 피해자의 명예와 사생활을 보호한다는 명목에서 마련되었지만, 성폭력 신고율이 10%미만인 우리사회에서는 가해자에게 면죄부로 작용하고 있을뿐이다.

더욱이 친고죄는 고소기간이 1년으로 한정되어 있어, 그 기간만 지나면 법적으로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다. 설혹 피해자가 고소를 해도, 1심 판결 선고 전까지 합의만 하면 이 사건은 없었던 것이 된다.
따라서 피의자(피고인)는 합의를 위해 피해자의 집이나 회사, 학교 등까지 찾아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피해자를 괴롭혔다. 심지어는 피해자에게 온갖 고통을 안기며 스토킹 수준의 협박까지 일삼았다고 전해진다.

사실 친고죄 폐지는 1993년 성폭력특별법 제정운동 시에도 여성인권운동단체에서 강력하게 주장했었다. 그럼에도 남성 위주의 법조인이나 정치인들이 “정조에 관한 죄”(당시 형법 제32장의 제목)라는 인식에 갇혀, 피해자가 스스로 입을 다물게 하는 친고죄 존치를 고수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친고죄 규정에 의해 피해자의 의사에 따라 형사소추권이 철회될 수 있기 때문에 피해자의 결정권을 보장하는 제도라는 주장도 있다. 겉으로 보기에 고소취하권은 피해자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로 보이지만, 오히려 피해자들은 온갖 협박과 회유 속에서 합의를 요구받는 등 많은 2차 피해를 겪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현실을 파악해야 한다. UN의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도 2007년, 2011년 연속해서 우리나라에 친고죄 폐지를 권고해오고 있다.

다행히 이번 19대 국회에서 여·야 한목소리로 친고죄를 폐지하겠다고 하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무엇보다 친고죄 폐지는 성폭력이 조금 난폭한 성관계여서 피해자가 용서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행위임을 인식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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