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엔 남에게 피해나 주지 않고 살고 있으면

말없이 대작할 수 있는 편한 친구가 그리워

  이악하고 냉랭한 세상을 사노라면 하루하루가 여간 지겹고 힘든 게 아니다.
  더구나 不感(불감)의 고개를 넘고 보니, 주제 넘은 푸념 같지만 이런 저런 책임과 굴레 때문에 늘 어깨가 무겁다.
  한마디로 노릇이 너무 많다.
  자식노릇, 남편노릇, 애비노릇, 친구노릇, 훈장노릇, 제자노릇, 부하노릇, 상사노릇, 선배노릇, 후배노릇, 심지어 글쟁이 노릇까지 합쳐져서 이리저리 얽힌 끈과 올가미 때문에 도무지 내 마음대로 하루하루를 가위질해서 쓸 수 있는 쉽고 편한 날이 거의 없다.
  게다가 하늘같이 뛰는 物價(물가), 내도 내도 한정이 없는 公課金(공과금), 툭하면 생기는 哀慶事(애경사), 갖가지 모임, 출퇴근길이면 무얼 타야 옳을지 막막하기만 한 교통 지옥…, 생각할수록 피로하기 그지없다.
  어디 그뿐인가,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자잘한 마찰이나 不協和音(불협화음), 서로의 주관이나 입장이 다른데서 오는 오해, 불신, 반목, 억측 등등 솔직히 단 하루도 어수룩하게 넘어가는 날이 드물다.
  어쩌다 머리나 식혀 보려고 친구나 동료들과 만나 봐도 부담은 엇비슷하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괜히 기고만장하는 소리, 상대방의 결점이나 약점 한두 가지를 지적해 놓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듯한 얼굴, 남의 작품이라면 읽어 보지도 않고 白眼視(백안시)부터 하려드는 고약한 버릇, 남이야 지루하든 말든 제전공이나 제사업에 성공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입심. 더구나 七顚八起(칠전팔기) 갖은 고초를 겪고 그 방면에 크게 성공(?)했다는 立志傅的(입지부적)인 인물을 만나면 그 不屈(불굴)의 투지와 끈질긴 집념에 한 풀 꺾여 내 쪽의 부담은 훨씬 加重(가중)되기 마련이다.
  왜들 이렇게 똑똑하고 열심인가. 고작 7~80년 살고 나면 그만일 텐데 한 2~3백년 살 것처럼 잔뜩 쌓아 놓고 게다가 너무 철두철미하고 완벽하기 그지없다.
  이래저래 산다는 게 팍팍하고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나날의 연속인 것만 같아 우울한 때도 많다.
  그런데 이런 日常(일상)의 여울 속에서도 가끔은 나를 빙그레 웃게 만들고 조금은 살맛이 나게 만드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들은 전혀 성공이나 출세하지 못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나를 신선한 갈등으로 사로잡는 이를테면 괜찮은 사람들이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서 어쩌다 볼 수 있는 정경이다. 세탁소에서 막 나온 30대 주부가 새로 다린 남편의 上衣(상의)를 반코트처럼 자기 어깨에 턱 걸치고, 下衣(하의)는 왼팔에 반반의 길이로 건 채 종종걸음을 치고 있다. 이런 경우 그 주부의 얼굴엔 아내만이 맛볼 수 있는 행복하고 열적은 미소가 어려 있다. 여자가 半(반)남장을 한 셈이나 아주 괜찮은 모습이다.
  40대의 아버지와 여중 1학년쯤 된 딸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다. 아버지가 그 딸의 무거운 책가방을 대신 들고 간다. 신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가방이지만 어린 딸이 옆에서 걷고 있는 한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는 부녀상이다. 괜찮은 아버지다.
  春季(춘계)대학야구 구경을 갔을 때 일이다. 이른 봄도 아닌데 날씨가 꽤나 싸늘했었다. 바람까지 세게 불어 꼭 겨울야구를 보는 기분이었다. 男女(남녀) 대학생 한 쌍이 내 옆에서 觀戰(관전)을 하고 있었는데 작은 여학생이 춥다고 몸을 움츠리자 우람한 남학생은 서슴지 않고 자신의 큰 잠바를 벗어 애인을 푹 덮어씌우는 게 아닌가? 옆에서 보는 사람들의 폭소가 터졌지만 괜찮은 남학생 같다.
  내가 뒷산으로 아침 散策(산책)을 나갈 때마다 자주 만나는 택시운전사 내외. 내가 산에 오를 무렵엔 아내가 남편의 차를 부지런히 닦고 있다. 내가 산에서 내려올 무렵엔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엄마가 시동을 걸고 있는 아빠에게 바이바이를 하고 있다. 엄마도 아기도 다 따뜻한 웃음으로 아빠의 무사고를 빌고 있는 것 같다. 괜찮은 가족들이다. 나는 한쪽 다리를 몹시 절면서도 아침마다 뒷산에 오르는 청년 하나를 알고 있다. 좁은 산길에서 나와 마주치면 그는 자기가 먼저 길을 비켜가려고까지 애를 쓴다.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싶지만 괜찮은 靑年(청년)같다.
  새해에는 나도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나 돼봤으면 좋겠다. 괜히 흥분하거나 센 체 하지 말고 낮은 목소리로 차분히 얘기할 수 있는 착한 사람이나 돼봤으면 싶다. 별 말이 없어도 좋으니 그저 담담하게 웃고 以心傳心(이심전심)으로고 對酌(대작)할 수 있는 편한 친구가 그립다.
  어느 의사의 말이 건강장수의 비결도 속을 썩이지 않고 재미있고 즐겁게 하루하루를 사는데 있다고 하니, 새해에는 좀 어정쩡한 사람 축에 들더라도 그저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대강개강 재미있게 살았으면 괜찮을 상 싶은데 글쎄 어찌될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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