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깨끗하고 더러움, 좋고 나쁨에 차별을 두면서 언어문자의 표현도 양극단을 향하고 있다. 그

 ▲김대열 교수
한 단은 시에서처럼 미사여구의 구사나 바른말 고운말로의 표현이며, 다른 한 단은 법률조문같은 아주 단순명료한 문장, 혹은 막말 등의 표현이 그러하다. 이와 같이 우리의 언어문자 사용이 양극으로 치닫는 데는 우리의 의사 전달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한 궁극적인 심리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은 아주 더웠다. 그야말로 폭염의 무더위가 한 달 가까이 계속된 듯하다. 사람들은 더워 ‘죽겠다’ ‘못 살겠다’ ‘살인적 더위다’ 등 극단의 언어, 즉, 막말까지 써가며 더위에 대해 짜증을 내고 이를 피해보겠다고 산으로 바다로 몰려다니기도 했다. 그 무렵 일본의 한 노인은 당국의 전력사용 절제시책을 따르느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에어컨도 켜지 않고 지내다 목숨을 잃었다는 신문기사를 접하기도 했다. 그처럼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가던 살인적 더위였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지금의 날씨는 언제 그러했느냐는 듯 시원하고 상쾌하다.

“여름 더위 지나가듯 한다”는 말이 있음에도, 이렇게 소리없이 슬며시 지나가는 더위를, 그때는 왜 그렇게 참지 못하고 ‘지겹다’ ‘못 참겠다’하며 경망스럽게 대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계절의 순환 앞에 숙연해진다. 우리의 말로도 행동으로도 못 물리는 더위를 물려보겠다고 에어컨을 켜대고 갖은 말로 증오했으니 말이다.
중국 송(宋) 대의 혜개선사(慧開禪師, 1183-1260)는 여름을 덥다고 아니하고 “시원한 바람이 있어 좋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말을 뒤집어 보는 것 즉, 언어의 편견을 버린 것이다. 나도 이렇게 언어를 뒤집어 보는 슬기가 있었다면 지난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지 않았겠는가?

봄에는 여러 꽃들 피어나고/ 가을에는 밝은 달이 뜬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 불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니/
이러쿵저러쿵 쓸데없는 생각에 얽매이지 않으면/
인생은 항상 즐거운 것을.
(春月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有雪, 若無閒事心頭. 便是人間好時節.)

위는 시의 전문이다. 그는 남들처럼 봄의 상춘(傷春), 가을의 우수(憂愁)에 젖지 않았으며 여름의 더위, 겨울의 추위에 집착하거나 얽매이지도 않았다. 이를 뒤집어 봄에는 꽃이 있고 가을에는 밝은 달이 있으며,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 겨울에는 흰 눈이 있어 좋다고 하면서 세상을 언제나 즐겁고 아름답게 보았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보고 느끼는 것만 가지고 그것이 모두인 냥 거기에 얽매어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내면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요구된다. 사물의 본성은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니라고 한다. 우리의 마음이 한 쪽으로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방편일 따름이다. 집착하는 마음, 양극단으로 흐르는 편견을 떨쳐버리면, “여름의 시원한 바람”, “가을의 밝은 달”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지 못해 지난 여름을 아주 덥게 보내고 전력소비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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