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에서 벗어날 지혜가 필요하다

 
진실은 편견을 벗으려는 열망이 있을 때만 실제의 모습을 드러낸다. 진리는 교과서 안에, 신문과 텔레비전 속에, 강단 위에, 권력의 선동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무지의 장막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진실에 이르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편견은 지성의 감옥이며 무지의 덫이다. 인간의 교육과 교양은 편견의 굴레를 벗기 위한 것임에도 때때로 교육으로 쌓은 편견은 거짓의 장막이 된다. 현대의 갈등 중 상당 부분은 문화와 종교와 이념의 편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문화 충돌과 전쟁은 편견의 가장 심각한 산물이다.

대부분 당연한 것으로 믿는 것이 편견일 때가 있다. 어떤 집단과 권력, 또는 무능한 학문은 교묘히 편견을 부추기고 갈등의 골을 깊게 한다. 우리는 어마어마한 권위로 포장된 학식도 시간의 검증을 통해 무식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아왔다. 지혜에 도달하고 싶은 이라면 한 번쯤 자신이 확신하는 바가 편견의 산물은 아닌지 의심해보는 것이 옳다.

지난 해 여름 혜초원정대를 따라 실크로드를 거슬러 올라가며 안타까운 문명 파괴의 흔적들을 보았다. 영화롭던 베제클리크와 키질 천불동, 쿠차 쿠르즈가하의 석굴 속 벽화들은 모조리 얼굴이 뜯겨졌고 철저하게 유린당한 채 파괴되었다. 불상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인간 정신이 만들어낸 아름다움과 경건함의 결정체는 유감스럽게도 흔적도 없었다. 누가 그런 끔찍한 짓을 한 것일까. 대부분의 설명은 그 지역이 무슬림의 지배에 들어감으로써 우상숭배를 금하는 교리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고고학자, 미술사학자들이 원용하는 이 설명은 진실일까?

그 몇 해 전 무슬림의 지배와는 무관한 중국 쓰촨성 쳉두와 그 인근 벽지에서 똑같은 정경을 보았다. 천 년 전 당나라 시대의 불상들은 모조리 목이 잘려졌고, 벽화는 파헤쳐졌으며 불탑과 불상은 파괴되었다. 산 중 깊은 곳까지, 아주 작은 도량의 불화까지 낱낱이 부서져있었다. 쿠르즈가하에서와 똑같은 모습이다. 그 불상들도 무슬림이 파괴하였을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이념의 광기가 지배하던 문화대혁명기 홍위병들에 의한 일이다. 이념과 권력은 인민을 무지와 편견으로 이끌었다.

키질 천불동 제10호 굴에는 진실을 알려주는 증언이 분명히 새겨져 있지만, 편견의 눈으로는 결코 바르게 볼 수 없는 일이다. 중국 공산당 혁명열사로 추앙 받는 조선족 출신 화가 한낙연(1898 ~ 1947)은 1947년 봄 키질 천불동을 발굴했다. 그는 자신의 재능으로 천불동에 남아있던 아름다운 벽화를 베껴 그렸다. 하나의 어긋남도 없이 색채와 형상을 고스란히 화폭에 담아 남겼다. 19세기 서양 고고학발굴단의 약탈 속에 겨우 살아남은 비천상이며 보살상, 부처의 전생담까지 아름다운 벽화들은 그의 재능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제 10호 굴 벽에 “아름다운 유산들이 더 빛날 수 있도록 아끼고 보존해 달라”는 글귀를 남겼다. 진실은 그때까지만 해도 몇몇 약탈된 벽화를 제외하고 벽화는 고스란히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무슬림은 천불동을 파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파미르의 준령을 넘어 파키스탄에 이르면 진실은 더 분명해진다. 파키스탄은 잘 알려진 대로 무슬림의 땅, 그것도 원리주의자들의 중심 지역이다. 지금도 무장한 탈레반들이 출몰하고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는 길기트 외곽 환한 절벽 위에 간다라 미술의 걸작인 카르가 마애불이 머리결 하나 다치지 않은 채 남아있고, 칠라스 강가 바위에는 지천으로 불탑이며 불상과 삼보의 상징 그리고 평안을 바라는 불교 기도문들이 암각화와 암서화의 형태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조우리안 사원의 불탑과 불상은 천 년을 넘겨 세월의 풍화를 견디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쇼카 대왕이 세웠다는 거대한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는 아직도 우뚝 서있다. 무슬림이 진격하며 불탑과 불상 모두를 파괴했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편견에 불과하다. 파괴는 오히려 서구 열강의 문화재 약탈 때문이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은 2001년 탈레반의 포격으로 파괴됐다. 12세기 인도의 불교대학 날란다는 무슬림의 침공에 의해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 교리 때문이 아니라 무력과 맹신의 광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진실을 외면한 학문은 무슬림이 실크로드의 불상과 벽화들을 파괴했다는 간편한 대답만을 내놓을 뿐이다. 실제로 만난 무슬림들과 달리 언론과 풍문 속의 그들은 왜 하나 같이 호전적이고 파괴적이며 반문명적으로 그려지는 것일까. 그들의 풍토와 문화적 배경은 지워버린 채 의도되고 집요하게 강요하는 편견이 있다.

약 30년 전 도서관에서 읽었던 티베트 관련 책들은 티베트가 척박하며 미신과 야만이 지배하는 땅이라고 기술하고 있었다. 그 오래된 오해의 뿌리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번식하고 있다. 누군가는 탄트라(Tantra)의 ‘지혜의 전승’이라는 본래 의미를 흔적 없이 가린 채 타락한 신비만을 강조한다. 진실 보다는 싸구려 호기심이 선행한다. 티베트 불교의 다른 말인 라마교(Lamaism)의 라마는 ‘스승’이란 뜻이며 결국 스승들에 의해 지혜롭게 전해져 온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아직 까지 주술과 불교의 결합이라는 오해를 벗지 못했다. 종교 속에 도사린 교만한 편견과 맹신, 이념의 선동, 불순한 목적, 진실 없는 무지가 그 배후에 있다.
진실은 편견을 벗으려는 열망이 있을 때만 실제의 모습을 드러낸다. 편견으로는 진실은 커녕 사실의 문턱도 넘지 못한다. 진리는 교과서 안에, 신문과 텔레비전 속에, 강단 위에, 권력의 선동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무지의 장막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진실에 이르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그럴 때만 우리를 자유롭게 할 진리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편견을 부술 지혜를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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