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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13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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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철학 산스카아라곤담학파가 처음 해석 생멸ㆍ변화의 법 결합하는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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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든 것(苦(고))보다는 쉬운 것(樂(낙))을 바람은 중생의 어쩔 수 없는 성향이다. 일부러 苦行(고행)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도 실은 내세의 즐거움을 바라고 있다. 깨달음을 이루어 마친 부처님의 당면한 첫째 문제는 이러한 성향을 가진 중생들과 어떻게 하면 자신이 얻은 수승한 다알음(一切智(일체지))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느냐에 있었다.
  어렵고 힘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점진적인 방법’을 취할 도리밖에 없다.
  부처님은 그의 가르침 속에 철학적인 설명을 시도하신 일이 없었다. 그의 가르침은 항상 평이하고 대중적이었다. 또한 그는 箭喩經(전유경)에서 보듯이 제자들의 철학적인 사색도, 그것이 시급한 해탈에 이르는 곧은 길이 아니라는 이유로 금하셨다. 불교에 철학이 없다는 것은 이런 면을 보고 한 말이다.

  ‘점진적인 방법’이란, 정도가 낮은 것으로부터 차츰 높은 것에로 이끌어감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낮은 단계에 있는 자에게 높은 단계의 존재를 가릴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경지를 최상의 것으로 받아들여 만족할 것이다. 부처님이 그의 가르침 속에 철학적인 설명을 시도하시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왜 그러냐면 만일 그런 종류의 설명을 해버린다면 그의 ‘점진적인 방법’은 망가지고 말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철학적인 체계나 설명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서도 처음에 뜻했던 그 ‘점진적인 방법’은 되지 못 할 것이다. 낮은 경지에 머물러 만족하고 있을 중생들을 높은 단계로 이끌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체계적인 실마리가 그 가르침 속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반드시 모르는 가운데에 제시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 어려운 문제가 불교경전에는 실로 묘한 방법으로 해결되어 있다. 이 방법을 나는 부처님의 수승한 ‘術語使用法(술어사용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의 평이하고 대중적인 가르침 속에는 심상치 않은 교리적 술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이들 중에 핵심적인 것은 수적으로 그렇게 많지 않지만, 그들을 깊이 연구해 볼 때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특히 語源(어원)적으로 고찰해 볼 때 그들 하나하나는 놀랄 만큼 정연한 철학적 체계를 이루면서 천만마디 철학적 에세이보다도 더한 뜻을 한마디로 다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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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한 보기로서 諸行無常(제행무상)을 들어 보자. 모든 行(행)이 무상하다는 그 ‘行(행)’은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그것이 그렇게 무상한 것인가를 경전은 물론 설명해 주지 않는다. 기껏해서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오 괴로운 것은 無我(무아)라고 하는 정도에 머문다. 이 諸行無常(제행무상)을 우리는 하나의 前提(전제)로서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것은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아니다. 그 ‘行(행)’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그렇게 무상하다고 주장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行(행)’이라는 한문 譯語(역어)가 나타내는 뜻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 行住坐臥(행주좌와) 등의 그 行(행)을 가리킴이니, 이것은 梵語(범어)의 ‘gamana’를 번역한 것으로서 ‘걸어감’을 의미한다. 둘째, 보薩行(살행) 등의 그 行(행)을 가리킴이니, 이것은 梵語(범어)의 ‘carya’를 옮긴 것으로서 ‘수행’을 의미한다. 셋째, 五蘊(오온) 十二緣起(십이연기)등의 行(행)을 가리킴이니, 이것은 梵語(범어)의 ‘산스카아라’를 옮긴 것으로서, 諸行無常(제행무상)의 그 ‘行(행)’도 이것을 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산스카아라’가 도대체 어떤 것일까가 문제로 된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은 昆曇學者(곤담학자)들이었다. 그들의 해석에 의하면 ‘산스카아라’는 본래 造作(조작)의 뜻이었으며, 이로부터 다시 遷流(천류)의 뜻을 발생하여 이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다 한다. 처음의 뜻에 의하면 ‘산스카아라’는 業(업)을 의미하며, 十二緣起(십이연기)의 그 行(행)은 곧 이것으로서 현재의 과보를 초래한 과거의 三業(삼업)을 뜻한다고 한다. 그리고 뒤의 뜻에 의하면 ‘산스카아라’는 有爲(유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諸行無常(제행무상)의 그 ‘行(행)’은 바로 이것이라 한다. 五蘊(오온)의 行(행)은 애초엔 思(사), 다시 말하면 意志(의지)를, 나중에는 色受想識(색수상식) 이외의 有爲法(유위법)을 모두 行(행)에 속하게 했으므로 뒤의 뜻에 따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行蘊(행온)을 心所有法(심소유법)과 不相應行法(불상응행법)으로 나누고 있다. <이상 佛敎學辭典(불교학사전) P80 참조> ‘산스카아라’를 ‘行(행)’이라고 번역한 것도 이런 견해에 따른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 해석은 당시 昆曇學派(곤담학파)의 교의에 입각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산스카아라’를 造作(조작)이나 業(업)으로 해석함은 十二緣起(십이연기)에 대한 그 학파의 三世兩重因果說(삼세양중인과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 그것을 遷流(천류)나 有爲(유위)라고 해석함은 그 학파의 諸法分類論(제법분류론)에 상응하고 있는 것이다. ‘산스카아라’라는 낱말에 과연 遷流(천류)라는 뜻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따라서 그러한 해석을 갖고 부처님 당시의 바로 그 뜻이라고 단정한다면 크게 잘못이다. 그런 뜻으로 사용됐을지도 모르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梵語(범어)나 프라크릿트(당시의 인도 俗語(속어))는 외래어가 거의 섞이지 않은 순수한 언어였다. 따라서 그 어휘에 대한 語源(어원)적인 고찰은 아주 용이했으며 일찍부터 어원학 (nirukti)은 바라문이 갖춰야 할 학식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언급을 우리는 원시 경전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당시의 철학자들은 또한 어원학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 쓰기까지 하는 말하자면 어원적인 言語生活(언어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런 사회에서 ‘진정한 바라문’임을 자처하시던 부처님이 그러한 언어 현상을 아주 도외시했으리라고 믿기는 어렵다.
  어원적으로 고찰할 때 ‘산스카아라’는 ‘sam’과 ‘kara’로 분석된다. ‘sam’은 영어의 ‘com(together)’에 해당한 접두사로서 ‘붙게’라는 뜻을 첨가하며, ‘kara’는 ‘kr(do)’라는 동사의 남성 추상명사로서 ‘함’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두 어소가 결합된 ‘산스카아라’는 그 근원적인 뜻을 ‘붙게 함’(putting together)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諸行無常(제행무상)의 그 ‘行(행)’은 어원적으로 고찰할 때 ‘붙게 함’을 의미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붙게 함’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붙게 함인가가 문제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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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행)은 본래 無明(무명)에 의해 일어난다. 五蘊(오온)에서 그것은 想(상)의 다음에 위치하고 있으며 十二緣起(십이연기)에 이르러서는 ‘無明緣行(무명연행)’이라고 밝혀 드러나 있다. 따라서 行(행)이 무엇인가를 밝히려면 그에 앞서 무명이 무엇인가를 밝혀야 한다. 무명이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 不如實智見(불여실지견)을 가리킨다. 그것은 객관적인 대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 본래의 참된 성품에 대해 어두운 것 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우주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은 어느 하나 항구불변한 것은 없다. 원인(因(인))만 있다면 반드시 그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그런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을 法(법)(dharma)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법에 대한 불교의 올바른 견해를 간단히 소개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하나는 이 모든 법의 달라짐을 ‘前滅後生(전멸후생)’했다고 보는 것이오 다른 하나는 그것을 단순한 ‘현상적 변화’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 만일 어떤 물건이 질적으로 달라졌다면 이 달라진 것과 달라지기 이전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물건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이러한 음을 불교에서 識(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완전히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라면 앞의 것은 滅(멸)했고 뒤의 것은 生(생)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법을 이렇게 보는 것을 ‘前滅後生(전멸후생)’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그것을 단순한 ‘현상(相(상))적 변화’라고 봄은 그 현상을 지키고 있는 본질(性(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본질은 ‘湛然空寂(잠연공적)’ 하고 ‘不生不滅(불생불멸)’할 것은 물론이다. 이것은 앞의 견해로부터 발달한 높은 경지임에 틀림없지만, ‘점진적인 방법’에 그 발달의 논리적 과정이 설명되지 않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모든 법은 이제 ‘본질ㆍ현상’의 구조를 갖게 된다. 이 구조 위에서 ‘본질ㆍ현상’의 차질현상마저 문득 타개해 버릴 때 그 순수한 알음을 般若(반야)라고 한다.
  無明(무명)(avidya)이란, 生(생) 대략 소개한 바와 같은 여실한 알음(vidya)과 모순(a-)되는 생각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前滅後生(전멸후생)’하는 법들을 그러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또는 ‘본질ㆍ현상’의 구조를 가진 한 법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명이 홀연히 일어날 때, 그것이 마치 허황한 꿈처럼 실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별로 문제 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라 그것을 실현하려는(欲(욕)) 작용이 일어나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 작용이 곧 ‘行(행)’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前滅後生(전멸후생)’하려는 法(법)들을 그러지 못하도록 한 데에 결합하는 양상을 띨 것이며, 또는 ‘현상적 변화’를 수행하려는 한 법을 그러지 못하도록 본질과 현상을 한데에 결합하는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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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원적으로 고찰한 ‘行(행)’(산스카아라)의 기본인 뜻, ‘붙게 함’은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너무나도 잘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곧 중생 속에 내재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노력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生滅(생멸), 變化(변화)하려는 법들을 그러지 못하도록 결합하고 있는 ‘함’이다. 따라서 몹시 힘이 들 것(苦(고))은 사실이다. 힘이 들기 때문에 끝내 무상하기 마련이다. 諸行無常(제행무상)은 다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상 고찰한 바와 같이 불교의 교리적 술어의 하나인 ‘산스카아라’는 특히 그것을 어원적으로 고찰할 때 놀라운 뜻을 함축하고 있다. 즉 그 한 마디는 바로 천만 마디 철학적 설명인 것이다.

 

고익진  대학원 불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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