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극…인간생명 추구하는 희랍극에 접근

차원 높은 철학적 대사

  노벨문학상의 수상작가인 세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에 대해서는 이미 그가 노벨문학상의 수상이 결정되기 전에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소설가로서의 베케트, 시인으로써의 베케트가 아닌 극작가로서의 베케트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그의 극의 특색을 규명해 보려한다.

  生涯(생애)
  전위극의 기수처럼 되어 있는 사무엘 베케트는 그가 표방하고 나왔듯이 앙티 테아뜨르(反劇(반극))적인 다시 말해 혁명적인 공헌을 한 작가임엔 틀림없다.
  그런 점은 연극에 있어서도 그랬거니와 소설이나 시에 있어서도 결국 그 구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의 연극만큼 타문학 분야에는 혁명을 가져오지 않았기에 그는 한 시인, 한 소설가로써 보다 극작가로써 유명한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20대에는 시인이며 30대에 소설가며 40대에 이르러서 희곡은 올바르게 나온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의 희곡의 가치는 능히 현실을 능가하는 경지에 이르렀을 것임은 자타가 공인케 된다. 그럼 사무엘 베케트는 어디서 태어나 어떤 과정을 거쳐 현금에 이르게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베케트는 올해 회갑을 넘은 지 만 2년째 되는 63세의 에이레 태생의 작가이다.
  1906년 지금의 에이레공화국의 더블린(애란의 수도)에서 중산층에 속하는 청교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퍽 운동신경이 발달되어 있었으며 남이 감히 따를 수 없는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어릴 때엔 애란의 애비극장운동이 이미 무르익어 일반화될 단계였으니까 적으나마 그 어떤 시대적 조류에 의거하여 분명히 그에게도 예이츠와 싱의 영향이 미쳤으리라 보아야한다.
  그가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그는 불어를 능통하게 할 수 있었으며 그 때는 럭비선수로도 이름 높았다.

  1928년에서 1930년까지 2년여에 걸쳐 그는 파리에 있는 어느 중학교에서 불어교사 노릇도 했다고 전하며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불역하였으며 그와 절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 동안은 줄곧 파리와 더블린을 왕래하곤 하였지만(이런 점에 있어서는 싱과도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1932년에는 아주 불란서 국적을 갖게 되었고 그로부터 현금에 이르기까지는 줄곧 불란서에서 생활하기에 이르렀다.
  사무엘 베케트가 문단에 데뷔하기는 1930년이며 최초에는 영어로 시를 썼다. 그런 연후 1939년에 이르러 그는 그의 첫 소설 ‘감자’를 세상에 내놓아 약간의 물의를 일으켰으며 ‘몰로이’ㆍ‘말론은 죽다’ 등 계속 소설에 손을 댔다. 그가 극작에 손을 대게 된 건 1950년이며 그 첫 희곡이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탈고한 지 만 3년이 경과한 1953년에 비로소 상연되었는데 그 동안은 쭉 ‘고도를 기다리며’의 식으로 프로듀서 잡기에 몰두했다.
  그의 작품들을 나열해 보면 소설로서 ‘Mololy’, ‘Malone Meurt’, ‘Mup hy’, ‘Nouve lcs et textes Pourri'en’, ‘Comment C,est’, ‘I,innommable’ 등이 있으며 희곡에는 'en Attendant Godot' 'Fin de Partie' 'Ohlesbeaux Jours'가 있다. 이 외에 많은 시편과 두 개의 히트물인 텔레비전 드라마가 있다.
  말하자면 사무엘 베케트는 한 극작가이기 이전에 시인이었으며 소설가였던 것이다.


  作品世界(작품세계)
  1950년대의 세계연극의 계열을 본다면 대개 표현주의와 상징주의가 발표 변형된 신표현주의 혹은 현대 상징주의가 테네시 윌리엄스 계열로 이루어졌고 근대극에서 볼 수 있었던 이른 바 사회성을 다분히 내포한 작품계열로 아서 밀러와 존 오스본이 그리고 극행위의 본원성으로 보아 가장 희랍극에 접근하는 방법을 들 수 있으니 그것이 소위 실존주의 사르트르에게도 전하면서 과거의 극체제를 배격하는 반극작가 조르주 아다모프, 유젠느 요네스코, 사무엘 베케트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상의 세 가지 계열의 공통점은 모든 예술이 그 자체가 인간생명의 진실을 추구하는 것과 같이 인간이라는 생명을 지닌 극체적 존재가 시간과 공간의 현실에서 인간을 재창조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니까 연극행위자체는 단순한 오락이 아닌 진실에 너무나도 많이 접근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반극의 경우는 아다모프나 요네스코, 베케트 등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계열의 작극(作劇)을 하여 이른바 앙티 테아뜨르를 형성했지만 앞에 제시한 다른 부류의 계열과는 천차만별이다.
  이들은 모두가 재래의 연극의 요소를 극도로 배제하기를 주장한다. 심리묘사도 필요 없고 투쟁도 배격한다. 다만 등장인물의 손짓이나 몸짓을 대화에 대신 시켜야 한다는 것이며 그러기에 일체의 수식적인 개입을 불허한다. (이는 연출의 개입을 배격한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니까 그들의 작품은 결국 사건진행과 대화와 재래식 연극의 방법과 효과에 대신 그 형이상학적 의미만으로 축소된 연극을 표현하는 것이다. 요네스코의 주장에 의하면 ‘연극이란 어떤 사상이나 교리를 알기 위한 수단으로써 존재해서는 안 되며 더구나 누구를 교육시키려는 목적으로 연극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계산된 구성이 있을 수 없고 평범한 가운데서 진행하여 발전해 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대개의 과거극이 결론을 미리부터 알려주는 게 일수이나 반극에서는 그것을 배격하는 것이다.

  베케트는 처녀작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고도’ (이는 신이라도 좋고 기다리는 사람의 희망이라도 좋다)를 기다린다. 얼마나 지난 후 난폭하고 거만스런 폭군이 기다란 끈에 노예를 매어 마치 소를 몰 듯 몰고 들어선다. 이 때 수줍은 소년이 나타나서 기다리는 두 유랑자 앞에 고도는 나타나지 않으리라 예언한다. 두 유랑자는 게으르고 방탕하면서도 무엇인가 조바심해서 기다리는 것이 받을 수 없는 구원을 받으려고 애태우는 심정이다.
  그러나 거만한 폭군의 운명도 더 복스럽지는 못하다. 그는 이 세상에서 승리했고 성공했으나 마침내는 시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의 노예도 순종의 보답이 없고 오히려 그의 비굴성 때문에 벙어리가 된다. 블라디머ㆍ럭기ㆍ에스트라곤ㆍ포조ㆍ소션 등 다섯 인물 중에 아무도 위안이나 구원을 받지 못하고 만다.
  제명자체가 말하는 ‘고도’란 지극히 상징적인데 신을 의미하는지 또는 인간을 말하는 것인지 막연한 인물이다.
  무대는 한 나무가 서 있는 시골길이다. 그 어떤 추상적인 의미를 지닐 뿐 장소는 사실상 임의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게임의 종말’의 지하실 역시 시간과 공간 밖에 존재하는 환상적인 장소의 역할 밖에 안 된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파리에서 흥행에 성공하자 영국ㆍ미국ㆍ일본 등 세계 방방곡곡에 번역 상연되었는데 모두가 가지각색으로 나타난 현상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 작품이 초연되기는 홍복유 교수의 번역으로 한재수 씨에 의해 1961년 12월 8일부터 10일까지 단 3회 공연을 충무로 5가 현대연기학원 소극장에서 가진 바 있었는데 한재수 씨는 당시의 연출 소감을 이렇게 잘라 말하고 있다. “‘고도’의 해석부터 문젯거리이며 초현실주의 연출수법으로 이끌어 갔는데 한국관객에겐 아직 이해가 될 수 없는 연극”이라는 것이다. “사실 반극 자체가 언어의 구사와 행동의 자기체면 같은 것인데 우리말에는 말 자체가 굴곡이 없어 양식화하는 길이 제일”이라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이것의 공연이 있었는데 아직 때를 벗을 수 없는 즉, 상업화 될 수 있는 단계의 연극은 아니라는 것을 金亮基(김양기) (在日劇評家(재일극평가)) 씨도 말한 바 있다. 즉 金씨는 “전위극은 전위극 자체대로 상연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반극 특히 베케트의 극의 특색은 요네스코나 아다모프의 극의 색체가 밝은 데 반해 어둡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대사 자체가 철학성을 띤 차원 높은 어귀여서 시나 소설을 능가하는 난해성을 가졌다는 점과 구태여 장소나 그 인물 하나하나가 어떤 판에 박힌 인물이나 실제의 장소일 수 없고, 그 때 그 때 변할 수 있고, 변화되어야 할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현대연극의 계열 중에서 두드러지게 다른 점이 곧 위에 말한 여러 가지의 난해성과 복잡성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고대희랍극이 인간생명의 진실을 추구했던 것이니 반극 역시 그 초점은 고대 희랍에 더욱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위의 예로 들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더라도 증명되고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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