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ㆍ<밀폐된 사랑>을 보고 연영과 신입생 연극 감상

  환상과 환상의 연결. 무의미한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생활이 아닌 하나의 연극을 가지고 인간의 미를 표현시키려는 의도를 무척 감명 깊게 보았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자유가 부여 된다”고 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을 현세에 있는 심리학자들은 그것을 묵살하려고 했다. 주인공이 밀폐된 동굴 속에서 35년간을 외부세계와 등지고 있으면서 동굴의 생활에서 싫증을 느끼고 밖으로 나오려 할 때 이미 거기에는 죽음이 있었다. 허나 두 사람은 그것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오려한다. 그것은 조물주에게 하사받은 자유 때문이라고 할까? 하나의 자유를 찾으려고 죽음을 무시하고 밝은 세상으로 나오려다 죽음의 앞에 섰다.

  이것은 인간의 심중을 그대로 표현했다고 할까? 아니면 적중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작품의 내용 중에서는 또 이해할 수 없는 얘기들도 있었다. 내가 이 감상문을 쓰기까지 7편의 연극을 감상하고 제 나름대로 생각해보았다. 허나 근래 연극에서 나는 하나같이 모호하게 생각되는 게 많았다. 작품 중 이러한 말이 있다.
  “35년간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오지 않았단 말이야.”
  그러면 35년전의 의상과 언어들이 그대로 표현되어야 하고 그것이 연극에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어느 관중에게나 다 공통적인 아쉬움일 것이다. 아무리 대학 연극이라 하지만 관중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작품 중 이런 말이 나왔다.

  “중국이나 소련에 억류되었다고 합니다.” 허나 이것은 완전 미스일 것이다. 35년전에는 중국의 본토가 장개석 총통하에 있을 때이다. 그런데 어찌 얽매일 수가 있으며 설사 억류되었다면 중국이 아니고 중공이란 말이 나와야했을 것이다.
  또, 35년 전에 한국에 TㆍV, 전축, 전화, 가스라이터, 곗돈 등 낱말이 있었을까? 그러면 작품의 내용을 한국에 국한 시킬 필요가 없다면 의상이나 이미지가 딴 나라 것으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한국적인 맛이 난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에서 35년 후에 있을 일이라고 가정한다 하면 그 작품의 말이나 의상이 일치될 것이다. 허나 작품을 보는 관객이 그렇게 생각 할까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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