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와 ‘동국’거쳐

혼란 중 중앙학생회장
사상 분열해도 일치단결

  ○…“佛敎(불교)종단의 각별한 배려로 베풀어진 오늘의 학문을 감사”한다는 李外潤(이외윤)(50년ㆍ불교과 卒(졸)) 동문.
  ‘惠化(혜화)’와 ‘東國(동국)’의 교차점을 겪고 6ㆍ25勃發(발발) 달포 전에 졸업, 현재 경기대학 도서관장을 지내신다.
  당시 사상적 분열로 대학캠퍼스는 혼란이 극심. 李(이)동문은 이 틈바구니에서도 전문학부 학생회와 東國大學學部(동국대학학부)학생회를 총괄하는 중앙학생회회장직을 3년이나 지켜 지도자적인 역량을 십분 발휘. 또 불교총무원 敎學局長(교학국장)도 맡았던 그야말로 ‘好事多魔(호사다마)의 大學生活(대학생활)’을 지냈다고.

  ○…혼란 속에서도 학교를 위한 일에는 일체 단결할 수 있었다고 지금도 자부가 대단하다.
  “국내 최고 권위의 교수진은 타대학에서도 청강하러 오는 일이 다반사였을 지경”. 뿐만 아니라 “교수와 학생들 사이의 대화가 원활하여 더불어 人生(인생)과 학문과 현실을 論(논)하기도”했다며, 지금의 대학생들은 패기조차 없음을 개탄.
  “진정한 학구열의 탐닉이 아닌 사회참여로 눈만을 돌리는 것 같다”고 一針(일침).

  ○…재학 당시 1950년 4월15일 ‘東大新聞(동대신문)’ 창간의 편집위원으로 참가하여 국내 大學新聞(대학신문)의 앞장을 섰다. “사상적으로 中道(중도)를 지켜” 별다른 물의 없이 1號(호)를 내었지만 채 2號(호)가 나오기도 전에 戰火(전화)에 휩쓸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며 못내 그 때가 아쉬운 듯.
  불교학과 중심의 ‘鹿苑(녹원)’誌(지)와 校誌(교지) ‘東國(동국)’을 창간했던 것도 이 무렵.

  ○…“졸업하자마자 터진 6ㆍ25가 안겨준 절망감에 쫓겨 대구 동화사로 入山(입산), 수도하다가 교편(文化史(문화사))을 잡았고.
  그 후 본교 총무과장ㆍ재단이사를 거쳐 경기대학으로 옮겨 學長(학장)을 역임하기도.
  “조용히 책 속에 묻힐 수 있는 도서관”을 맡은 현직에 만족한다는 李(이)동문은 25년전 중매결혼한 朴福先(박복선)(41)여사와 2남2녀의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계신다.
  장남은 현재 미국에서 工學(공학)을 연구하는 중.
  자택은 ‘성북구 정릉동 10번지 1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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