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전의 인물’로 꼽혀

‘불온 학생’으로 옥고
교육행정가로 업적 쌓아

  ‘惠專(혜전)의 人物(인물)’을 들라면 누구나 黃帝周(황제주)(50) 동문을 꼽는다. 日帝末(일제말)의 거칠고 각박했던 時代(시대)의 大學街(대학가)를 주름잡은 약방감초격이란다. “惠專(혜전)은 역시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도량다웠다.”고 말하는 黃(황)동문-. 그는 당시 惠化專門(혜화전문)(본교전신)의 기질을 지극히 東洋的(동양적)인 것이었다고 풀이한다. 開放的(개방적)이기보다 思考的(사고적) 내향적이었다. 그렇다고 맹목적인 복종은 거부.
  植民地(식민지)정책엔 知性人(지성인)답게 저항할 줄 아는 그런 內面性(내면성)이었다.

  ○…저항의 형태는 學生(학생)들의 文藝作品(문예작품)과 論文(논문) 그리고 활동 속에서 나타나, 이른바 ‘불온학생’으로 獄苦(옥고)를 치른 이가 적지 않았다.
  “東大門署(동대문서)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李東華(이동화)교수가 모든 責任(책임)을 지겠다고 獄苦(옥고)를 자청”한 것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

  ○…黃校長(황교장)은 졸업 후에도 시련이 겹쳤다. 茂朱(무주)군청에 재직 중 징용-.
  장진 수력발전소로 가다가 1백여 명의 노무자를 이끌고 함흥에서 탈출, 산속에서 은신하던 中(중) 6개월 후에 해방을 맞았다. 참으로 감격적인 해방이었다고 黃(황)동문은 회상한다. 그 후 大田工業(대전공업)에 英語(영어)교사로서 교육계에 첫발을 들여 놓았다. 그 후 장학사, 공보과장, 충남도 학무과장, 문교부장학관, 그리고 오늘의 충남고등학교장 등 교육행정가로서의 업적을 쌓아왔다.

  ○…충남고등학교는 초급대학의 시설을 능가하는 남녀공학. 특히 과학과 실험학교로서 그 시설은 방대하다. 학생은 1천5백여 명, 현재 黃(황)교장을 비롯하여 3명의 동문이 교사로 재직 중-.
  교육목표는 도의심의 개발,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 향상, 진로지도의 적정, 과학적 생활태도의 육성에 두고 있다.

  ○…충남동창회의 창립을 李在福(이재복)동문(보문고 교장)과 같이 하기도 한 黃(황)교장-. 모교에 대한 관심도 유별하다. 장학제도의 확충, 교수진의 강화, 고등학교와의 유대강화를 통하여 효율적인 교육도장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결혼은 해방 후의 일.
  부인은 이종숙 여사와 2남2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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