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생활 가톨릭과 상통 불교 근대화 경전에서 비롯돼야

  어떤 이든 간에 세상의 잡다한 일들과 지나친 소음이나 현대 문명의 혼착 속으로부터 떠나 자주 가보는 절이 있을 것이다 非信徒(비신도)에게 있어서는 절이라고 하는 것은 ‘조용함과 平和(평화)’,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이다. 차가운 냇물들, 곰팡내 가득하고 조금은 먼지 끼인 향내 짙은 낭하나 법당들. 금박의 불상에 여러 가지 표현으로 묘사된 부처의 면모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우리들을 靜觀(정관)과 명상을 하도록 인도한다. 그리고 나는 불상 주위로 줄지은 수많은 제자들의 모습에 항상 매력을 느낀다. 또한 근래의 화공들이 다시 그리도록 예부터 전해 내려온 절간 벽들의 아름다운 벽화들, 그 쾌활한 취향이 그러하다. 내가 즐겨 찾는 절은 全北(전북)의 ‘금산사’와 慶南(경남)의 ‘쌍계사’ 둘이 있다.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이면 웅장하게 울리는 종소리는 사람들을 어떤 두려움과 경이의 이상한 감정에 싸이게 한다. 가끔 그 소리는 내가 그 音波(음파) 위에 떠들려진 것 같이 느껴지게도 한다. 승려들이 기도나 염불을 할 때 두드리는 목탁의 공허한 소리는 염불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신비스럽고 이상하도록 짜증나는 소리로 들린다. 이와 관련 하여 불교와 ‘가톨릭’의식에서 발견되는 유사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으니 흥미롭다. 聖像(성상)들, 法服(법복), 독신생활, 깨끗이 머리 깎은 女僧(여승)들, 제단 앞에서 타는 촛불들, 그윽한 향내, 그리고 기도할 때 만지는 염주들이 그것이다. 오렌지 금박의 像(상)들, 기도時(시)의 合掌(합장), 그리고 연등행렬, 이런 모든 것 외에 더 많은 것들이 그 예식을 볼 때마다 어느 쪽에서 어느 쪽의 것을 빌려왔는지 궁금하게 할 정도다. 확실히 불교이건 ‘가톨릭’이건 간에 사원 안에서의 많은 예배形式(형식)을 가졌던 오랜 옛날에는 그들 사이에 많은 宗敎的(종교적) 交流(교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벚꽃이 필 때나 휴일에 사원의 분위기를 잡치는 것은 소음뿐이다. 술을 마시고 밀려닥치는 인파, 혼잡, 스피커의 째지는 소리, 비비꼬는 춤을 추는 사람들, 거기에 맞춰지는 ‘아프리카’의 정글 리듬, 모두 깨끗한 산속 휴양지의 주위를 망치게 하고 불안한 소음으로 채워 놓는다.
  나는 이런 때에 승려들을 보거나 명상과 평화와 고요를 찾아 절에 온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나는 때로 경내를 모독한 난폭한 놀이들을 완화시키거나 조정하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방관해야 하는 회색 法服(법복)의 승려들을 본다. 불교寺院(사원)에로의 그러한 관광추세는 그것의 유지와 활동을 하는데 수많은 대가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장소에 드나드는 것은 거의 누구에게나 유혹적이다. 나 또한 그러하여서 일단 山寺(산사)에 오르면 일상생활의 오물과 먼지 속으로 돌아오기가 매우 싫다. 우리 모두가 멀리 떨어져, 단순한 생활 속에서 자기 수양과 훌륭한 일들에 몰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은 세계의 풀기 힘든 곤란한 일을 해야 하고, 반면 어떤 사람들은 거대한 요구가 따르는 대중들과 어울리려 하고 또 솟구치는 조류와 세계의 주된 문제들과 씨름을 기꺼이 하여야 한다. 내 생각에는 승려들이란 생활로부터 탈피하였으며 일단 그들이 승려인 이상 그들은 평화의 상징이요, 영혼의 치료자요, 마음의 평정을 재창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의 잔잔한 생활태도가 탐난다. 불교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하는 많은 非信徒(비신도)들이 그렇게 수많은 經典(경전)들 중에서 현대말로 번역이 되어 있는 것이 너무 적어서 소외감을 느낀다. ‘로마’의 ‘라틴’말처럼, 그 많은 경전을 외운다는 것은 옆에서 배우고자 아는 사람들에게는 한낱 허황한 일처럼 보여진다. 얼마나 많은 지혜들이 漢字(한자)나 해인사의 목판 같은 ‘산스크리트’에 잠겨 있어 번역을 기다리고 있는가? 불교 경전을 원래 의미에서 읽고 공부한 기초지식이 없이는 참 불교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 다만 2차적으로 우리 주변에 흩어진 부분을 받아들여 알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독학과 修道(수도)로서 열반의 경지를 맛볼 수 있는가 의심한다. 인간은 보통 자기 구제를 위하여 힘써보려고 하나 그들 內面(내면)의 전쟁 즉 미움, 욕망, 生(생)에서의 위압 때문에 망설이게 마련이어서 아무나 자기수양을 한다고 생을 던지고 뛰쳐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난폭한 행위와 편견은 우리가 자기 수양을 하려하여도 그것을 꺾고 만다. 우리들의 善行(선행), 惡行(악행), 사상과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준 상처들을 계산하면 어떠한 종류의 對照表(대조표)가 이루어질까? 보통의 우리 가련한 인간들에 있어서는 借邊(차변)이 너무 무겁고 크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 연약한 힘을 가지고 이 세상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찾으려고 제아무리 노력한다 하여도 그것을 나는 두려워한다.
  나는 언제나 승려들과 이야기를 즐겨 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삶의 형식에 몰두하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山寺(산사)를 방문하고 맑아진 기분으로 돌아와 우거진 숲과 지저귀는 새들이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과 아름다움, 생활의 평온을 회상하게 해주는 옛 건물들이 있었다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항상 즐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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