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 이해에 좋은 계기 여독 잊게 한 제석사지 발견소식

  ◇…中國(중국)불교사의 권위자로 알려진 牧田諦亮(목전체량)박사는 본교 史學會(사학회) 초청으로 지난달 21일 來韓(내한), 27일과 29일에 본교에서 강연을 가진 바 있다. 또한 ‘폴ㆍSㆍ크레인’박사는 美國人(미국인)으로 전주중앙의료원원장으로 재직한 바 있고, 얼마 전 귀국 시까지 한국 불교에 큰 관심을 가진 분이다. <편집자 註(주)>

  中國佛敎史(중국불교사)연구에 생애를 바쳐온 나에게 1949년 이후 중국대륙에서 불교가 쇠퇴하여 왔다는 사실은 가장 큰 슬픔일 것이다. 중국역사에서는 여러 번 주권자에 의하여 불교가 迫害(박해)받은 일이 있었다. 특히, 三武一宗(삼무일종)의 法維(법유)(北魏太武帝(북위태무제), 北周(북주)의 武帝(무제), 唐(당)의 武帝(무제), 五代後周(오대후주)의 世宗(세종))에서 佛敎敎團(불교교단)은 거의 재기불능에 이를 만큼 철저한 抑佛(억불)의 서리를 맞았다.
  그러나, 당시 불교도들은 이 탄압을 이겨 냈다. 그리고 탄압 이전보다 도리어 불교는 빛났었고 法輪(법륜)은 常轉(상전)하였다. 그리고 排佛(배불)정책을 시행한 옛날의 군주들은 종교 그 자체까지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共産中國(공산중국)에 있어서는 정책 수행상 필요하면 종교에 대하여 微溫的(미온적) 대책을 꾸미고, 또 때로는 媚態(미태)까지 보이며 동남아시아 외교에 불교를 이용하였다. ‘티베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티베트’의 정치건설이 궤도에 오르게 되자 ‘티베트’의 종교적 지도자 ‘달라이ㆍ라마’와 ‘판챈ㆍ라마’를 더 이상 남겨둘 이유를 찾지 못한 중공은 이들을 叛亂(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리하여 ‘달라이ㆍ라마’는 국외로 망명할 처지에 놓였고, ‘판챈ㆍ라마’의 所在(소재)는 오늘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중국 본토에서 정책수행상 불교를 이용할 단계는 지났다. 그리고 舊(구)종교, 舊(구)문화, 舊(구)도덕은 모두 <惡(악)>으로 규정되고 추방하였다. 그러므로 공산 중국 불교가 중흥하리라는 정조는 전혀 없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20세기 후반기 이후 淸朝末(정조말), 중화민국, 중공초기의 중국불교사를 저술하는 일이 나에게 주어진 課業(과업)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이 著述(저술)을 위하여 1963년, 인도, ‘씰론’ 등 여러 동남아세아 華僑(화교)지역의 불교시찰차 3개월간 여행했던 적이 있다. 또 1969년에는 중국의 불교시찰과 中央(중앙)도서관의 敎煌經卷(교황경권)조사를 위하여 한 달 여행한 일도 있고 올해에는 4월1일부터 홍콩세계를 불교弘法大會(홍법대회)에 참석하고 대만에 들렸다가 4월21일 한국에 와서 5월13일까지 20여일간 머물게 되었다. 특히 ‘중국불교 最近史(최근사)’ 저술을 위하여 한국에 오고 싶던 희망이 실현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여기엔 한국불교의 현실을 꼭 보아야한다고 권유한 滯日(체일) 中(중)인 金知見(김지견)씨의 노력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연일에 걸쳐 동국대학교 교수님들의 친절한 지도에 감사할 따름이다. 

  학생시절에 단 한 번 급행열차로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스쳐지나간 것 밖에 없는 나에게 한국은 참으로 未知(미지)의 세계였다. 그런데 동국대학교 구내서점에서 ‘名山古刹(명산고찰)을 찾아’(李載昌著(이재창저))를 사서 읽다가 나는 큰 힘을 얻었던 것이다. 그 책 맨 앞에 僧伽寺(승가사)에 대한 소재가 그것이다. 景德王(경덕왕)15년(756)에 狼跡寺(낭적사)의 秀毫(수호)스님이 그의 스승 僧伽大師(승가대사)를 경모하여 건립한 것이 僧伽寺(승가사)다.
  唐(당)의 高宗(고종), 中宗年代(중종년대)에 實在(실재)한 唐(당)나라 長安(장안)의 大薦福寺(대천복사)에 住錫(주석)한 분이며 후에 安徽(안휘) 肝胎(간태)의 普照王寺(보조왕사)에 住錫(주석)한 바 있는 亞域僧(아역승) 僧伽和尙(승가화상)(708入寂(입적))의 유적인 것이다.
  나는 京都大學(경도대학) 인문과학연구소의 ‘東方學報(동방학보)’에 이 僧伽和尙(승가화상)의 생애와 死後世人(사후세인)의 追慕(추모), 涯水一幕(애수일막)의 水路安全神(수로안전신)과 그의 神格(신격) 外洋航路(외양항로)의 安全神(안전신)으로서의 僧伽和尙(승가화상)―泗洲大師(사주대사) 僧伽大聖(승가대성)―에 대하여 연구를 발표한 일이 있다. 그리하여 중국대륙 각지에 전파된 僧伽和尙(승가화상) 신앙을 널리 수집한 바 있으나 한국의 관계 자료에 대하여는 그동안 전혀 몰랐으며 자료가 있으리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책의 기사를 보고 佛敎(불교)의 넓이와 그 깊이를 고쳐가지게 되었다. 이 하나만으로도 한국에 온 보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밖에도 訪韓(방한)을 기쁘게 한 일이 있다. 나는 금년 1월 ‘六朝古逸觀世音應驗記(육조고일관세음응험기)의 연구’를 출판하였다. 이것은 중국 六朝(육조)시대에 유행하였던 觀世音信仰應驗(관세음신앙응험)의 기록이며 중국에서는 일찍이 散秩(산질)되어 불과 7백수십년 전에 日本(일본) 鎌倉(겸창)시대에 寫本(사본) 一冊(일책)에 유일하게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와 本(본) 文復原(문복원)을 시도한 것이 이 책이다. 이 應驗記(응험기)의 최후에 백제 때의 觀音信仰(관음신앙) 事例(사례)가 二件(이건) 追補(추보)되어 있다. 백제불교에 대하여 아는 바 없는 나는 그 注解(주해)를 붙일 아무런 자료도 얻지 못했었다. 그런데 백제 武廣王(무광왕)시대의 還都(환도)나 帝釋寺舍利(제석사사리)에 대한 문헌이 동국대학교 박물관장 黃壽永(황수영)교수가 최근 발견하여 帝釋寺(제석사)의 舍版經典(사판경전) 등 중요한 자료가 있음을 4월21일 김포공항에서 호텔로 향하는 도중 安啓賢(안계현)교수로부터 들었다. 本書(본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과오를 남기고 있지만 다못 辛苦(신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모든 괴로움을 잊고 있었고 긴 여행의 피로도 잊었다. 아직 한국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도 한국은 전혀 무관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안 것이다.
  초기의 일본 불교가 한국 불교에서 계승된 사실은 일본의 초기 불교 예술의 몇 가지 造品(조품)을 보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人爲的(인위적) 정치적인 장해가 한국불교와의 교류를 곤란하게 하는 조건이 있다 하더라도 불교를 통하여 교류의 隔絶(격절)을 완화하여 평화성취의 공헌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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