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식ㆍ지성으로 여과된 향취

  散文(산문)을 詩(시)와 雄辯(웅변)에 대립시킨 것은 ‘알랑’이지만, 사실 散文(산문)의 진실은 흔히 그것을 걸침으로 하여 자신의 모자라는 면을 은폐하려드는 연설투, 설교투, 강연투 또는 낭독투라는 그 모든 투에서 해방되는데만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제 멋에 겨워 넘어가기만 함으로써 眞實(진실)하나를 看過(간과)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스스로 방어하기 위하여 지니는 散文(산문)의 특성인 것이다.
  구절에 가락이 잡혀 나오면, 이미 그 散文(산문)의 순수성은 버려진다. 散文(산문)은 그런 비열한 악취미에의 유혹을 강력히 배제함으로써 스스로의 엄정성을 확립한다.
  더구나 수필은 결코 스스로를 구속하지 않는 데에 그 생명이 있다. 어설픈 옷자락을 미리 휘날리지 않음으로서 독자의 審美眼(심미안)을 안정시켜준다. 수필에 형식이 없다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수필은 假定(가정)하고 試圖(시도)할 따름이다. 애초에 냄새나는 結論(결론)을 가지지 않는다. 단지 그 假定(가정)과 試圖(시도)에 良識(양식)의 有無(유무)는 가릴 필요가 있다. 작가의 良識(양식)이 튼튼할 때, 우리는 안심하고 그 假橋(가교)를 돌다리인 것처럼 친근하게 믿고, 그 수필의 향기의 彼岸(피안)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良識(양식)이 코에 걸려서는 안 된다. 하나의 語(어)나 句(구)의 놓임새 가지고서도 훌륭한 수필가는 능히 그 惡臭(악취)를 처리할 줄 안다. 참된 思想(사상)이 결코 强制(강제)하지 않듯이 뛰어난 한 편의 수필은 그저 그윽할 뿐이다.
  지금 우리네 정신의 주변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데마고그’요. 또 ‘카리스마’적인 ‘도그마’이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우리네 美(미)의 개념을 흐리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비열한 문장의 가락이다. 그것은 모두 强制(강제)를 그 기본으로 삼고 있는데 특징이 있고 우리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켜 줌으로써 예술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난다.

  李昌培(이창배) 수필집 <꽃과 마스크>는 설명적인 것, 이야기 거리的(적)인 것 또는 고백적인 것 등 그 모든 수필의 材質的(재질적)인 것들을 두루 섭렵하면서도, 결코 身邊雜記的(신변잡기적)인 구질구질한 낌새를 풍기지 않는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良識(양식)과 知性(지성)의 채에 정밀하게 여과되고 소화되어 단정한 향기를 숨겨 둔다.
  꽃 한 송이를 그윽이 내다보면서 스스로의 思想(사상)을 구축해 나가는 과정마저 매혹적이다. 그것이 설령 偏見(편견)이라 한들 그 筆致(필치)의 閃光(섬광)에서 판단의 대상은 흐려지는 법이 없다. 女性觀(여성관)을 피력하면서도 그는 설교하려 들지 않는다. 그럼 상대방마저 남성과 함께 같이 웃게 만들어준다. 그렇다고 批判(비판)의 화살이 正(정)을 잃지는 않는다. 旅行(여행)이건 讀書(독서)건, 혹은 작자 자신이 <백지상태>라고 자변하는 그림에 대한 鑑賞眼(감상안)마저도 그 본질적인 정당성을 확립하고 있다.
  수필이 어렵다는 말이 예사로운 가운데 발간된 이 수필집에는 英文學(영문학)의 해박한 식견이 꽃밭처럼 군데군데 수놓아져 우리의 안목을 즐겁게 하고, 무엇보다 그 안정된 筆致(필치)가 이 또한 우리네 知性(지성)과 良識(양식)의 건강성을 증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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