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 천(金闡) 의 마음을 찾아 떠나는 여행 <25> 기준

전통적 척도법은 무게나 부피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어 실생활에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미터법이 강제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숫자의 나열 속에 우리는 휩싸이게 되었다. 숫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삶의 단위가 도량형 속에 숨어있다. 세상에 사람들이 좀 더 공감할 수 있는 기준들이 표준의 역할을 하는 세상을 바란다.

가끔 국수를 먹기 위해 찾는 집이 있다. 동대문 인근 시장 한 구석에 있는 작은 국수집이다. 눈에 띠는 간판조차 없이 그냥 ‘국수전문점’이 그 집 상호다. 홀 안엔 벽을 깃댄 긴 식탁과 등받이 없는 간이 의자만이 줄줄이 놓였다. 다 해도 열 명이 앉기에 좁은 집이다. 장식 없는 벽엔 그저 메뉴와 가격만 적혀있다. 메뉴라 하여 특별한 것 없이 장터국수, 비빔국수, 여름에 잠깐 콩국수를 할 뿐이다.

가게를 연 것이 30년 전이니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주인장 얼굴에 주름이 더 깊어졌고 국수값이 조금 올랐을 뿐이다. 나머지는 그대로이다. 맛도 국수의 양도 30년 전과 지금이 꼭 같다. 맛은 주관적인 것이라 같음을 주장키 어려운 일이다. 하나 양은 예나 지금이 같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루에 삶아 파는 국수다발이 그 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손님 중에는 오랜 단골이 많다. 모두 국수집 주인의 맛과 양에 토를 달지 않는다. 10년 전 먹은 국수와 오늘 먹는 국수가 같은 것은 여간해선 경험키 어려운 일이다.
시장통 음식에는 대개 인정(人情)이 담겼다. 때문에 이 사람과 저 사람 음식의 양이 다른 것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배고파 보이는 이에겐 국수 한줌 더 내어주고, 까탈스런 깍쟁이에겐 박한 것이 자연스런 인심이다.

국수집 주인에겐 예외가 없다. 배고픈 이나 타박 놓는 손님이거나 언제나 같은 량, 꼭 같은 음식을 내놓는다. 무려 30년 동안 한 번도 국수가닥이 줄거나 늘어난 적이 없다. 그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그의 힘이다.
량(量)이란 무게나 부피를 재는 말이다. 수량(數量), 질량(質量) 따위로 무엇인가 재고 측정하는 뜻이 담겼다. 량을 재는 기준을 일러 도량형(度量衡)이라 한다. 예전부터 국가에서 엄격한 기준을 세워 관리하는 표준이다.

 

급격한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이들은 국가법령을 선포할 때 가장 먼저 도량형을 바로잡았다. 중국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는 중국 최초로 도량형을 세운 자다. 국가를 통일한 강력한 군왕의 징표로 도량형의 표준을 정한 것이다.
우리 역사에도 시대마다 도량형의 재정비를 찾아볼 수 있었다. 강한 왕권을 지향하던 세종과 영조는 각각 척(尺)을 새로 정하였다. 시장의 질서를 새로 삼았다. 백성의 편의를 위한다하지만, 실은 세금을 쉽고 많이 걷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미터법은 프랑스 혁명의 결과물이다. 혁명의 이념처럼 세상 어디에서도 동등한 가치와 단위를 세우기 위해 절대치를 찾은 결과물이다. 절대치란 당연히 관념 속에나 존재한다.
1960년 개정된 기준으로 1미터는 크립톤 86 스펙트럼의 등적색선 파장을 표준으로 삼는다. 크립톤원소가 무엇인지 아는 이들은 전세계 인구 중 몇 명이나 될까. 게다가 그 원소를 분광 측량하여 적색선 파장을 기준으로 삼는다니… 시간과 길이의 등가 측량 기준을 읽어보면 그야말로 가관(可觀)이다. 절대 관념의 숫자란 바로 그런 것이다.

국내 경제근대화정책 이후 전통적 척도법은 시장에서 쫓겨났다. 1근은 600그램으로, 한자는 33.3센티미터로 치환되었다. 그런데 600그램이 어느 정도의 양감이며 생활 속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있는가.
쌀 한 홉은 한 사람의 한 끼 식량이고, 한 말은 한 달 끼니거리이며, 한 가마니가 있으면 한 해를 먹을 수 있다. 그러니 다섯 식구에게 필요한 일 년 식량은 쌀 다섯 가마니였다. 쌀 80킬로그램은 아무 의미 없는 관념 속의 수치일 뿐이다. 그 수치가 의미를 가지려면 다시 인간의 량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지역마다 논 한마지기의 크기가 다른 까닭은 그곳에서 나는 소출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숫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삶의 단위가 도량형 속에 숨어있다. 대다수 현대인의 경제관념이 희박해진 데는 미터법의 영향도 적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숫자의 나열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미터법 강제가 심각해졌다. 시장에서 척(尺)이 표시된 자는 찾아볼 수 없다. 판매하다 적발되면 훈계의 수준을 넘어 벌금형 등의 실형을 선고받는다. 때문에 목수들은 웃돈을 주고 암시장을 찾는다. 한척은 성인의 상박(上膊)을 기준으로 삼는다. 때문에 손에 맞는 가구는 척자로 재고 만든다. 미터법상의 33.3센티미터는 인간의 척도가 아니다.

30인치 텔레비전은 어느 날 갑자기 76.2센티로 둔갑하더니, 아무도 공감하지 않자 30형이란 이름을 달았다. 30평 아파트는 99.172평방미터로 표기된다. 30평이라 쓰면 처벌받는다. 30평이란 대략 30명 정도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이지만 99.172평방미터의 크기는 그냥 숫자이다.
미터법이 널리 쓰인다하여도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미국은 그들의 마일단위를 포기하지 않았고 영국은 그들의 파운드 단위를 포기하지 않았다. 실생활과 맞지 않아서다.

우리는 때때로 기준의 의미를 잊고 살아간다. 척도는 권력자의 취향이나 강제력의 상징이 아니다. 기준을 강제하는 이들은 좀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고구마를 600그램으로 팔지 않고 한 근으로 달아서 판다하여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 권력의 지엄함을 어린 백성 하나, 나약한 학생 한 명 처벌하는 일에 소모한다면 국수집 주인만도 못한 초라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세상에 좀 더 공감할 수 있는 기준들이 살아남길 바란다. 기준이 표준의 역할을 하는 세상을 바란다. 오늘 내 마음의 잣대는 냉엄한지 살피고 또다시 살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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