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호 교수의 독서산책

가끔 서양철학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어떤 책을 읽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철학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으면서 서양사상과 현대문명의 근간이 되어온 철학과 그 정신을 다소마나 접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어떤 책 하나를 집어서 “이것이다”라고 추천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서양철학’이라고 말하지만, 수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나름대로의 관심을 갖고 탐구해온 결과가 서양철학의 이름 아래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런 반가운 질문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요즈음 같이 철학이 과학, 기술, 경제, 대중문화의 뒷전에서 그 모습이 위축되어 있는 현실에서 이런 질문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철학에는 대중을 위해서 쓰여진 고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일반 시민이나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지식인들을 위해서 이런저런 성격의 철학책들을 출판했지만, 그런 책들은 한때 대중의 관심을 받다가 곧 잊혀져 갔다. 그래서 일반인이 읽을 만한 철학의 고전의 수는 문자 그대로 손가락으로 꼽히는 정도이다. 그 가운데 하나를 들라고 하면 데카르트의 ‘제일철학에의 성찰’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서양철학의 뿌리를 보여준다면, 데카르트의 ‘성찰’은 근대 세계의 정신을 제시한다. 지금까지 서양철학의 필독서로 수없이 거론되어 온 이 책을 여기에서도 추천하는 이유는 이 책이 서양철학은 물론 근현대세계의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특별하기 때문이다. 철학을 ‘무엇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정의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데, 데카르트는 이 책에서 근대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묻고 그것에 답하고 그 방향을 제시한다. 즉 이 책의 위대함은 데카르트가 제시한 훌륭한 이론들에도 있지만, 그가 제시한 근대적 사고의 방법, 방향, 태도에 있다.

방법적 회의로 시작하는 이 책은 인간의 본성, 신의 존재, 진리, 물질, 마음과 육체의 관계를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비교적 쉽게 쓰여졌다. 대개 서양철학의 책들이 그렇듯이 이 책도 위의 철학적 주제들을 놓고 이런 저런 논의를 하고, 논증들을 제시한다. 때로는 그 논의와 논증이 치밀하고 복잡해서 이전에 철학적인 글을 별로 읽지 않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거나 인내심을 잃게 할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의 정의에 대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을 고려하면 데카르트의 ‘성찰’을 두고 불평할 일이 아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데카르트의 ‘성찰’은 그 교수의 책보다 훨씬 읽을 만할 뿐만 아니라, 그 역사적 가치에 있어서는 전혀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땀을 흘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지 않고서 높은 산을 오를 수 없듯이, 논리적이고 치밀한 사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철학의 즐거움과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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