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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3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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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동국인 <32> 시인 신경림 동문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민중시인

 

신경림 시인 프로필

△1935년 출생 △1954년 영어영문학과 입학 △1956년 등단작 ‘갈대’ △1971년 ‘농무’ 발표 △1974년 제1회 만해문학상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 △1992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1997년 동국대 석좌교수 △2002년 시집 ‘뿔’ 출간 △2008년 시집 ‘낙타’ 간

   
 
인은 사회의 밑바닥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름 없는 자들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들의 희로애락을 소박한 언어와 토속적 운율의 시로 구현해냈다. 책이 빼곡히 쌓여있는 자택 서재에서 한국 시단의 거목, 신경림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어려서부터 시를 가슴에 품었다. 그래서 문학에 전통이 있는 우리대학에 진학했다. 6.25전쟁 후 폐허가 되어버린 가난하고 암울한 시절이었다. 도처에 포탄 탱크가 허물어져 있었고 상이군인과 거지 떼들이 버글버글했다.
“딱히 갈 데도 없고 학교 도서관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지. 학생들 처지가 거의 비슷해서 주로 책을 읽고 토론하며 지냈어.”

책과 술, 그리고 사람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책과 술을 매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책 읽는 데 서로 경쟁이 붙은 거야. 술 먹는 자리에서 누가 책 하나 새로 읽었으면 그날 주인공이 됐어. 자기가 읽은 책 얘기하면서 큰소리치고, 압도하고, 그 재미로 읽었지. 나머지는 그 책을 돌려보고, 그와 다른 의견도 내놓으며 보완도 하고… 지금 생각해도 재밌는 추억이야.”
신 동문을 비롯해 시를 짓는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동국시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국내 대학 최초로 대학생들이 직접 만든 시집이었다.
“‘동국시집’에 시를 실으면 기성 문단에서도 인정해줬으니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 만하지. 동국대가 문학 전통으로는 아주 알아줬어. 문학하는 학생들도 많이 모이곤 했지. 자부심 가질 만한 일이야.”
그 과정에서 문학에 뜻을 둔 사람들을 많이 사귀었다. ‘인동회’라 하여 ‘인사동에서 만나는 동국대 문인들 모임’을 통해 지금까지도 그 연을 이어오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여 지난날의 추억을 되새기며 회포를 푼다.
학창시절 영문과 이근삼 교수를 떠올렸다. “문단에 막 등단한 젊은 교수였는데, 학생들에게 스스럼없이 대해주셨다”며 “그분의 지도에 따라 많은 책들을 접할 수 있었고, 그 후로도 계속 가깝게 지냈다”고 했다.
덧붙여 당시 교수로 재직 중이던 서정주 시인과의 친분 또한 회고했다.
“그 분 시를 좋아해서 강의를 신청했지만, 그렇게 강의 준비를 열심히 하는 분은 아니셨어. 나도 뭐 열심히 안 듣고(웃음). 그것보다 젊은 학생들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하셨지. 온화하신 성품이라 학생들도 많이 따랐고. 댁에 자주 찾아가서 술도 마셨는데, 야간 통행금지 때문에 자고 온 적도 많았지.”
대학교 2학년 때 ‘갈대’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그 후 10여 년 동안 곳곳에서 광부, 농사일, 장사, 공사장 인부, 장돌뱅이, 학원 강사 등 온갖 일을 했다. 이때의 경험은 그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삶을 시에 담아내는 데 자양분이 되었다.

민중의 애환을 시에 담아내
1971년 발표한 ‘농무(農舞)’는 농촌의 현실을 소재로 농민의 삶을 그려냈다. 이는 당대의 주류 시단과 다른 것이라 더 주목을 끌었다.
“그 무렵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소득이 50달러. 만들 수 있는 거라곤 빗자루 정도였으니 상상이 가려나. 60~70년대 산업화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은 건 사실이지만 희생당하는 사람들도 많았지.”
시인은 농촌 현실을 바탕으로 핍박받는 민중들의 애환을 노래했다. 그는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했다. 뿐만 아니라 민중들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시를 지향했다.
“시라는 것은 그 시대의 피해자들, 희생자들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는 거야. 가장 밑바닥에 사는 사람들의 정서를 표현하지 않고서는 좋은 시가 될 수 없지.”
70~80년대 군사독재가 심해지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강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특히나 양심 있는 문인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글 하나하나에 검열이 들어갔다. 책도 금서로 지정되는 것이 많았다.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았고 수감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인은 체제와 타협하지 않고 신념을 지켜나갔다.
“굉장히 암울하고 고달픈 시대였지.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 도저히 침묵할 수가 없었어. 그런 체제하고 싸우지 않으면 좋은 시가 될 수 있을까. 상황을 극복해야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되는 거니까. 시는 그에 일정 부분 기여해야 된다고 봐.”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져야
신 동문은 요즘 대학생들이 취업 준비때문에, 독서나 인문학 공부에 소홀한 것을 아쉬워했다.
“시를 읽으면 언어감각이 발달할 뿐만 아니라 정서가 풍부해지고 여유있게 생각할 수 있게 해줘.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어. 요즘은 기억력, 박학다식만 가지고 사는 세상이 아니야. 오히려 시를 읽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봐.”
시인은 대학 시절 책을 많이 읽어둘 것을 누차 강조했다.
“무슨 책이든 닥치는 대로 읽으라고 말해주고 싶어. 삶의 기초가 되거든. 사회에 나가면 바빠서 읽을 시간이 안 나. 또한 시에 대해서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시하고 논다는 생각으로 시와 자주 접촉해봤으면 해.”
특히 문인의 길을 가려는 후배들에게 “시인의 길은 왕도가 없다”며 “책을 많이 읽고 자꾸 써보는 수밖에 없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라”고 조언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앞으로의 바람에 대해 물었다.
“보통 사람, 그리고 평균적인 사람이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 모든 사람이 인간적 모욕을 느끼지 않고 자기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사회 말이야.”
평생을 힘없는 민중의 편에 서 온 노 시인에게서 나온 것이기에 ‘인간의 존엄성’이란 말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무겁고 깊이 있게 다가왔다.

김유경 기자  audrey@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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