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 선봉에 선 동국인 … 김중배 열사의 희생 가슴깊이 새겨야

▲ 시위 도중 경찰의 곤봉에 맞아 사망한 김중배 열사의 위령제를 마치고 교정을 나서는 학생들.

1965년. ‘굴욕적 한일외교 정상화 반대’시위를 최종 점검하는 한 밤중의 4ㆍ19 묘역.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당시 평화선사수투위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박동인 동문(법65졸)은 “한일회담 과정에서 특히 ‘이승만 라인’(평화선)이 엄청나게 양보되는 낌새를 느끼고 이건 우리가 강력하게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보경찰이 계속 우리를 미행했기 때문에 변장을 하기도 하고, 모의 장소를 그때그때 옮기느라 애를 먹었다. 그러다 보니 각 대학 가담자도 수시로 바뀌었다”고 회상했다. 박 위원장은 평화선사수투위 이전에 1964년 한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해 활약하기도 했다.

농어촌연구회 성토대회, 돌연 해산
박동인을 비롯한 평화선사수투위 회원들은 4월 6일. 연합시위를 모의하던 중 사전에 발각돼 연행되기도 했었는데, 이들은 10시간 만에 풀려나 ‘평화선사수’투위에 합류, 7일 낮 1시쯤 시내에서 모임을 갖고 전국 대학생들에게 평화선 사수를 외치고 나선다.
그들은 호소문과 학생 석방 및 복학을 요구하는 대정부 요구사항을 성명서로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에 참석한 우리대학 대표자는 박동인, 김경남(정외66졸), 이철홍(법66졸)이었다.
1994년 1월 27일자 뉴스메이커에는 “타협점의 정점은 이튿날 전 대학이 동시에 거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일회담 비준문제는 자칫 정치적으로 휘말릴 우려가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평화선 사수투쟁’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서울대를 제외하고는 전부 호응하는 분위기였다”고 우리대학 4ㆍ13거사를 책임지고 있었던 이철홍(당시 법3)의 회고가 그 당시 상황을 설명해 준다.
그런데 돌발사태가 일어났다. 4월 9일 12시 농어촌연구회가 주동이 되어 투위를 따돌리고 교내 성토대회를 벌인 것이다. 이들은 하오리(일본 옷)를 입고 피리와 꽹과리를 동원, ‘국방선이며 60만 어민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사수하라’는 등 5개 요구조건을 내걸고 성토대회를 가진 다음 ‘일본환’이라고 쓴 모의 일본어선을 발로 짓밟아 박살냈다. 그러나 2천여 명이 운집한 이 집회는 학생처와 총학생회의 개입으로 주최자인 농어촌연구부 측이 12시 30분경 해산을 선언했다.

평화선사수 전 대학으로 확대
그러는 사이 ‘13일의 화요일’은 다가오고 있었다. 4월 13일. 경찰은 시내 곳곳에서 모의학생들을 색출ㆍ연행했다. 오전 10시 30분부터 배구장에 집결하기 시작한 고려대생들은 11시 25분 ‘민족의 생명선 피로 사수’ 등의 플래카드를 걸고 성토대회를 열었다. 주최자는 총학생회와 평화선사수투위였다.
시위대를 막으려는 경찰의 공세에 시민 일부도 학생들과 함께 투석전에 합류했다. 연세대, 성균관대, 경희대도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시내 곳곳에서 경찰의 곤봉과 최루탄, 데모대의 돌멩이가 어지럽게 흩날리는 동안 남산 기슭의 우리대학 전사들도 용틀임을 하고 있었다. 오후 12시 30분경 교정에서는 ‘제2의 을사조약 즉각 철회하라’, ‘상륙하는 게다소리 몽둥이로 때려잡자’는 등의 구호가 물결치기 시작했다. 우리대학 평화선사수투위의 이름으로 선언문이 낭독됐고, 1천여 명의 시위대는 ‘반민족적 가조인은 전면 무효임을 선언한다’는 등 7개 항목의 결의를 마치고 1시 40분쯤 교문을 박차고 나섰다.

경찰 강경진압에 김중배 사망
길가에 잠복하고 있던 경찰이 흩어진 데모대의 뒤를 추격했다. 김중배(당시 농학2) 군도 이 과정에서 경찰을 피해 골목으로 내달았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이었다. 허겁지겁 흩어지는 학생들을 경찰이 덮쳤다. 여기서 김중배는 경찰 곤봉에 머리를 얻어맞고 필사적으로 빠져나와 인근 민가에 뛰어들었다. 이때가 오후 3시쯤이었다.
곧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집안을 이잡듯이 뒤져 3명을 체포했다. 하지만 골방에 숨어있던 김중배 군과 나머지 두 명은 발각되지 않았다. 경찰이 나가자 집주인 정씨가 김중배를 2층으로 데려가 응급치료를 한 뒤 안정을 시켰지만 의식을 찾지 못했다. 가까운 의원에 데려가 응급치료를 받게 했고, 의사는 그를 급히 시립중부병원에 입원시키도록 소개장을 써주었다. 그러나 시립병원과 수도의대병원 등에서 번번이 입원실이 없다고 거절당했다.
진료거절은 수 차례 반복되다가 14일 자정을 넘겨서야 서울대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결국 김중배 열사는 하루 뒤 유명을 달리했다. 사인은 두개골 골절. 그러나 검찰 수사 결과 경찰봉에 맞아 사망한 사실은 인정됐지만 가해경찰이 누구였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6ㆍ3 열사’ 김중배 군의 유해는 남한강 줄기가 돌아나가는 고향 목계마을의 선영에 안장됐다. 그리고 그 비극의 이름은 4ㆍ19희생자 노희두와 함께 동우탑에 새겨졌다.
박정희 정권 최초의 ‘학생열사’였다. 김중배 열사는 충북 중원 출신으로 충주고를 졸업했으며, 우리대학 4ㆍ9 성토대회를 주동한 농어촌연구회 회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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