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최고령 투수 류택현(LG 트윈스·경영 94졸) 동문

 

‘백전노장’ 류택현의 대학 시절은 파란만장했다. 휘문고를 졸업하고 진학한 우리대학에서 그가 제대로 야구를 한 기간은 단 1년이다. 1학년 때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류택현은 당시 야구부 감독과의 불화로 2학년 때 야구를 잠시 접었다. 체육특기자가 아닌 일반 학생으로 학교를 다녔던 것. 3학년이 돼서야 마운드로 돌아온 그였지만 이번엔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4학년이 되자 그는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이를 악물기 시작했다. “4학년 때까지 단 1승도 없었다. 그런데다 부상 복귀 후엔 구속도 잘 나오질 않았다. 그래도 제구력과 구속 중 한 가지는 잘 해야 (이적)시장에서 가치가 생기는데 그러지 못하니 진로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결국 남산 산책로 부근에서 개인훈련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열심히 훈련에 매진하던 류 동문은 서서히 몸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구속이 좋아졌다. 그리고 경기에서 그는 좋은 피칭을 선보이며 OB 베어스(현 두산) 관계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당시 왼손 투수에 목말라하던 OB는 1994년 신인드래프트에서 류택현을 1차 지명했다. 그의 프로야구 입성은 그렇게 이뤄졌다.

2002년, 인생의 전환점이 됐던 ‘커브’
류택현 동문은 자신의 주무기로 ‘커브’를 꼽았다. 많은 투수들은 다양한 구질의 공을 던지는데 그 중 류 동문은 커브를 자신있게 내세웠다.
이유는 있었다. 1994년 OB에 입단했지만 프로무대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5년간 2패 6세이브를 기록했고 1998년 LG 트윈스로 트레이드됐다. 당시를 회상하던 류 동문은 “OB는 당시 기회의 구단이었다. 가면 일이 잘 풀릴 줄 알았지만 정반대로 힘든 시기의 연속이었다”며 당시의 아쉬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LG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그는 불펜 투수로 서서히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그의 야구 인생을 180도로 바꾼 순간이 왔다.

바로 2002년 5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에서의 경기였단다. “그 날 경기 이전까지 주로 패전처리 투수였다. 당시 지고 있던 경기였는데 갑자기 팀이 역전했고 승리조인 최창호 선배가 마운드에 올라가야 했지만 몸 풀 시간이 짧아 내가 올라가게 됐었다.” 1점차의 긴박했던 상황, 그의 공 하나에 승부는 바뀔 수 있었다. 하지만 류택현 동문은 대담했다. “마음 편하게 야구를 제대로 한번 해 보자는 마음으로 던져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긴박했던 상황에서 커브를 던졌는데 너무 잘 들어갔고 그 때의 그 공이 지금의 내가 있게 하지 않았나 싶다” 그 이후 패전처리 투수란 오명을 벗어던진 류택현 동문은 ‘필승조’에 이름을 올렸고 지금까지 그가 ‘불펜의 강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19년 선수생활 ‘인간 승리’의 표본
2012년 현재까지 이어진 19년간의 류 동문의 선수생활엔 우여곡절이 많았다.
혹자들은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 일컫는다. 지금까지 세운 기록만으로도 그를 ‘기록의 사나이’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817경기 출전으로 투수부문 통산 최다경기출장 기록을 갈아치웠고 데뷔 16년 만에 국내야구 최초 100홀드를 달성했다(현재 103홀드). 현역 최고령 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그에게 ‘기록 갱신’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 속엔 시련도 있었다. 2010년 말 왼쪽 팔꿈치 부상으로 은퇴의 기로에 섰다. 2011년 한 시즌을 통째로 쉬며 방출되는 곤욕도 겪었다. 하지만 수술을 받고서 보란 듯이 2012시즌 마운드에 복귀했다. 류 동문은 부상 당시 가슴이 철렁했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팔꿈치 인대가 많이 손상돼 본래 안 좋았다. 그런데 멀리 던지기를 하다가 공이 잘 날아가지 않는 것을 보고 나를 지탱해주던 마지막 인대가 끊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오랜 고민 끝에 수술을 결심했던 그는 오직 야구장에 다시 서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단다. 잠시 눈시울을 붉히던 그는 “다시 해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운드에 다시 설 오직 하나의 목표로 힘든 재활을 버텼다”고 밝혔다.

체력 비결은 아침식사, 100홀드 “뿌듯”
이번 시즌 류택현 동문은 플레잉 코치의 임무도 도맡았다. 만 40살의 노장에겐 두 가지 일을 해내기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없이 거뜬히 해내고 있는 그의 비결은 바로 홍삼과 아침식사다. “지난해 담배도 끊었고 술도 마시지 않는다. 홍삼을 먹고 있고 아침을 꼭 챙겨먹는 편이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원칙을 강조했다. 운동선수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거듭했다.
지금까지의 기록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달라는 질문에 류 동문은 ‘100홀드’ 달성을 꼽았다. 홀드란 중간계투 선수들에 관한 용어다. 자기 팀이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등판, 다음 투수에게 리드하는 상황을 물려주고 강판한 투수에게 주어지는 기록으로 불펜의 주 임무인 ‘현상 유지’를 완벽히 수행한 데 대한 기록이다. 중간계투 요원들에겐 소중한 성적지표다. 그러나 계투 요원들의 일반적인 지명도를 고려하면 그리 관심받기 힘든 수치인 것이 사실. 하지만 류 동문에겐 특별한 100홀드다. “103홀드라는 수치는 언젠가 깨질 수 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그러나 프로야구 최초 100홀드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내겐 소중한 기록이다.”

모교 감독 ‘관심’, 송진우 기록 넘고 싶어
1000경기를 바라보고 있는 류택현 동문의 최종 고지는 어디일까?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듯이 언젠가 마운드를 내려와야 할 때 은퇴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그는 우선 목표로 1000경기 출장을 외쳤다.
또한 모교인 동국대 야구부 감독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도자로 나간다면 기왕 모교 야구부를 한번 이끌어보고 싶다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송진우(무역88졸) 동문의 최고령 등판기록 경신이다. “만 43세에 이루신 등판 기록인데 이를 깨려면 앞으로 4년 정도를 떠 뛰어야 된다. 쉽진 않겠지만 이 기록을 깨고 나야 어느 정도 성공한 선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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