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기가 감돌자 몸짱이란 표현이 기승을 부린다. 벗어젖히기 좋은 더운 여름이 다가오니까.
그래서일까? 최근 영화들에서 몸, 특히 여성의 몸을 욕망과 존재방식을 담은 기호로 읽어내면 흥미롭다.
‘은교’에선 싱그러운 젊은 여성의 몸이 전시된다. 직접적 응시보다 은밀한 훔쳐보기 대상으로 전시되는 여성의 몸, 눈부신 살빛, 다소 은밀하게 드러나는 허벅지와 가슴골...그런 몸은 거울 앞에 선 노시인이 직접  응시하는 자신의 쳐진 몸과 대비된다.

이 두 가지 몸은 나이듦과 젊음, 남자와 여자라는 이항대립 속에서 (늙은) 남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젊은) 여성의 몸이란, 영화역사 시선의 역사적 공식을 보여준다.
‘간기남’에서는 옷으로 가려진 부위 여성의 몸을 은밀하거나 노골적으로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섹시 몸짱’ 보여주기에 흥행패를 던진 것처럼 보일 정도로. 결과는 별로였지만. 
여성 스스로 여성 몸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영화들도 포진해 있다. ‘레드마리아’는 배가 드러난 온갖 여성들의 몸을 전시하는 포스터를 내걸고 등장한다.
여성의 몸을 노동하는 몸으로 접근하는 이 다큐멘터리에서 몸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이다. 특정 부위를 몸짱으로 드러내며 훔쳐보기를 유도하는 여성의 몸과는 다른 기호체계에 속한 몸이다. 숨쉬고 노동하며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배를 가진 다양한 몸들. 어떤 이는 엄마, 어떤 이는 창녀, 어떤 이는 비정규직 노동자, 어떤 이는 이주여성, 위안부 할머니로 불리운다. 그러나 이들은 여성이란 이름으로, 즉 배를 가진 여성의 몸이란 기호 속에서 만난다.

잔혹동화 재구성 작업에 들어선 브레이야감독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 등장하는 몸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생각해보라. 마녀의 저주에 걸려 100년간 온 몸에 거미줄이 드리워진채 잠자는 몸, 그러다 운명의 왕자님이 나타나 키스해주면 깨어나는 공주의 몸! 아무 것도 안하고 잠만 자기에 순결한 몸, 어딘가 은밀한 곳에서 왕자/남성을 기다리는 여성의 몸을 그려낸 샤를르 페로의 동화는 남성욕망의 어린이판인 셈이다.
그러나 브레이야는 잠자는 몸을 깨워 숲 속으로, 도시 속으로 돌아다니며 모험하는 몸을 재창안해낸다. 살아난 아나스타샤의 몸은 매달리는 왕자의 청을 제치고 자기만의 인생길로 떠난다.
꼭끼는 옷으로 몸을 조이고, 높은 힐에 발목을 세우기 위해 꽉 조여맨 발로 가방을 들고 다니는 학생 친구들을 학교 공간 도처에서 만난다.

몸짱임을 과시하는 것일까? 자기 패션이 없고 상업화된 유행패션에 말려들어 그런걸까? 온몸의 세포가 숨쉬고 움직이기에 불편한 몸보다는 자유롭게 살아 숨쉬는 몸 패션을 여성 스스로 만들어내는 유행이 퍼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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