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교 동문

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 빛깔과 모양만으로도 건강상태나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보고가 설득력을 얻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카타르시스(catharsis) 이론의 영감을 제공한 게 똥이었다면,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배설(purgation) 이론은 아예 똥이 주인공이다. 그는 배설의 순간을 심미적 완성과 쾌감의 절정으로 본다.

그런데 똥을 뜻하는 한자 ‘분’(糞)자를 보면, ‘쌀’(米)과 ‘다르다’(異)의 뜻이 합성된 걸 알 수 있다. 그 의미의 결합은 오묘한 이치를 보여준다. 만약 밥을 먹었는데 밥알이 그대로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몸은 신비하게도 음식물을 분해하여 피와 살을 만들고, 남겨진 찌꺼기는 똥이란 이름으로 곱게 배출시킨다. 그러니까 처음의 상태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꾼 게 똥이다.

여기서 우리는 똥이 함의한 창조의 원리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모든 창조는 대상이나 현상을 변형하거나 왜곡하는 순간 이루어진다. 뉴턴의 만유인력은 사과를 왜곡한 것이며, 권총은 새총을, 트럭은 지게를 변형한 게 아닌가? 무릇 위대한 발견이 본래의 모습에서 달라진 결과들이라면, 그건 이미 똥의 배설과정이 우리에게 보여준 바로 그 모습이다.

많은 양의 음식을 먹으면 똥의 양이 증가하는 것처럼, 많은 걸 읽고 생각하면 정신의 똥도 증가한다. 입맛을 돋우기 위해 에피타이저가 필요한 것처럼 정신적 충만감, 정신의 배설을 위해선 감동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잘 감동하는 사람은 창조적 발견에 가까이 다가선 사람이다. 잘 감동하는 사람은 삶의 희열 또한 남다르게 누리는 은총을 받는다. 니체가 최고의 인간형으로 제시한 호모 포에타(Homo poeta), 즉 시적 인간이란 삶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된 인간, 바로 감동으로 충만한 인간인 것이다.

만약 행복한 삶과 불행한 인생을 구분하라 한다면, 나는 감동의 유무로서 그 양자를 나누고 싶다. 뭉게구름이나 빛고운 단풍뿐인가? 어느 학자의 놀랄만한 연구, 벌판에 갑자기 솟아난 고층빌딩, 이슬 머금은 풀잎들… 생각해 보면, 하찮은 일상의 소재들, 사소한 사건들, 무엇 하나 창조적 발상의 아이템과 무관한 게 없듯, 감동적이지 않은 게 없다. 발명가는 수도꼭지에서도 영감을 찾으며, 시인은 나뒹구는 돌멩이에서도 시상을 얻는 법이다.

그러므로 창조적 콘텐츠는 특별한 곳에 숨어있는 게 아니라, 평범한 걸 보고 크게 감동한 결과다. 그런 점에서, 똥이야말로 전향적 자각의 한 표본이 아닐 수 없다. 처음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뜻밖의 모습으로 거듭난 게 똥이라면, 똥은 우리 몸의 감동이 빚어낸 창조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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