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종국 교수의 독서산책

▲ ▲십자군: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

종교를 위해 대규모 전쟁을 벌이는 것은 종교적 관용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종교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공격하거나 죽이는 것이 의무로까지 간주되었던 시대가 있었다. 십자군 전쟁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십자군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시대정신에 따라 달라졌다. 18세기 볼테르를 비롯한 계몽 사상가들은 십자군을 권력에 미친 성직자들 때문에 벌어진 불관용의 전쟁이라고 비웃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상징이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성스러운 전쟁으로 묘사되었다. 해석과 평가가 달라진 가장 큰 이유는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의 역사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에 대해 토마스 매든은 현재적 관점과 가치 기준이 아니라 중세적 맥락에서 십자군을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의 지적은 우리 사회에도 꼭 들어맞는다. 한국 사회가 십자군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9·11테러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미국으로 대변되는 서구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 사이의 대립과 갈등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두 문명 사이의 대립과 갈등의 역사적 기원으로 간주되는 십자군에 대한 관심도 동시에 증대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2002년 프랑스 저널리스트 아민 말루프가 쓴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이 번역되었고, 2003년 김태권이 그린 만화 ‘십자군 이야기’가 출판되어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렇지만 두 책은 20세기 아랍인의 눈과 대한민국 사람의 눈을 통해 십자군을 바라보기 때문에 십자군의 실체를 정확히 보여주지는 못한다.

2005년 번역된 매든의 ‘십자군’은 위와 같은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책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십자군을 비도덕적이거나 사악한 사건으로 치부하고 혐오하거나 빈정대기는 쉬운 일인데 이러한 비판적인 평가는 현재적 가치 기준을 근거로 한 판단이다. 중세적 맥락에서 십자군을 재평가하려는 그의 문제의식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는 십자군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지나쳐 “중세 사람들에게 십자군은 신앙과 자애의 행위였으며 자신들의 세계와 문화, 생활방식을 지키려는 수단이기도 했다. 현대인이든, 중세인이든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 싸운다”고 십자군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만 해석하는 실수를 범했다. 종교적 열정과 이상주의가 십자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잘못 인도된 신앙과 그로 인한 전쟁과 약탈이라는 측면도 함께 지적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가 필요하다는 카(E. H. Carr)의 주장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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