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映畵(영화), 독자적 藝術性(예술성) 지녀

  ‘바쟁’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말하고 있다. “제7예술(영화)이 우리에게 어떤 방법으로 내용을 전해주는가를 묻기보다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가를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영화는 경험을 영상에 의해 옮겨 바꾸는 것이며 작든 크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각종의 형태변화의 총화다.

  ‘誤發彈(오발탄)’, ‘剩餘人間(잉여인간)’, ‘殉敎者(순교자)’, ‘막차로 온 손님’ 등 그가 사랑하는 일련의 作品(작품)계열에서 보인 人間(인간)과 그 狀況(상황)과의 대결은 映畵作家(영화작가) 兪賢穆(유현목)감독(東大(동대) 國文科卒(국문과졸))의 침착한 자세 속에 도사리고 있다.
  映畵(영화)예술로 向(향)한 그의 發熱(발열)(?)은 大學在學(대학재학)때 이미 시작됐다. 戰後(전후) 활발하게 일던 演劇(연극)부흥 무드 속에서 보다 ‘새로운 종합예술’로서의 映畵(영화)로 전향한 이후 끝없이 人間(인간)의 本質(본질)을 추구한 問題作(문제작)들을 제작하면서 映像(영상)에의 집념은 더욱 굳어졌다.
  재학 중 그 어느 때에는 ‘샤르르ㆍ스펜샬’(佛(불)영화작가)의 ‘죄와 벌’에 매료되어 무려 14번째로 그 영화를 볼 때는 ‘마라리아’로 거의 死境(사경)을 헤메었으나 끝까지 자리를 지킨 집념의 덩어리였다.
  그 후 韓國(한국)영화가 너무나 결여하고 있던 映畵美學(영화미학)과 ‘테크닉’을 본격적으로 파고들어 재학 중 ‘영화예술연구회’를 조직 장편劇映畫(극영화) ‘海風(해풍)’(상영시간50분)을 만들면서 필생의 예술작업은 시작된 것이다. 얼마 전 구미(歐美) 20여개국을 여행하면서 실험영화 4백여편을 보고 왔다고 한다. “인간의 지능과 무한한 ‘이미지’와 기계科學(과학)이 벌이는 피비린내 나는 투쟁의 자세를 본 것 같았다”면서 그것으로 영화의 마력을 더욱 절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映畵(영화)의 藝術性(예술성)이 인정되기는 無聲(무성)영화시대에 ‘몽타주’이론(理論)(화면 처리법)이 성립되면서 부터였다. 그 후 영화는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표현 기술에 있어서 거의 경이적으로 다양해졌다. 그래서 兪(유)감독은 “과학의 發達(발달)의 정도를 예견할 수 없듯이 映畵美學(영화미학)역시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할 것이라”고 한다.
  카메라 현상의 조작, 다양한 ‘렌즈’의 구사, 색채의 변화, 속도, 다양한 조립 혹은 ‘몽타주’를 통해 다른 예술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예술성을 보게 된다. 카메라만이 표현할 수 있는 이와 같은 독자적인 美學(미학)을 성숙시키지 까지는 여러 사람의 영화作家(작가)가 있었다.
  그중에는 ‘르베르ㆍ브렛스’감독(불(佛))의 ‘순수영상주의’ 등의 영향이 컸으며 여기서 탄생된 것이 프랑스 ‘누벨바그’의 영화美學(미학)이었다고 한다.

  兪(유)감독이 주장하는 그의 ‘독창적인 映像主義(영상주의)’는 “時間(시간)과 空間(공간)의 容器(용기)(즉 영화란 예술수단)에서 時間(시간)과 空間(공간)을 제거한 새 次元(차원)의 觀念世界(관념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런 의도에서 그는 이미 25만원으로 만든 12分(분)짜리 ‘線(선)’, 2만3천원의 제작비로 50秒(초)짜리 ‘손’ 등 ‘시네 포엠’ 형식의 前衛(전위)영화를 만들었다. 未來(미래)교육수단의 주류를 이를 ‘교육영화’에 대한 판심을 강조하기도 하는 그가 표현하고자하는 作品世界(작품세계)는 “社會(사회)의 밑바닥을 그리면서 그에 대한 모순성의 해부와 절망적인 現代人(현대인)의 형상에 대한 부단한 추구”란다.
  곧 ‘크랭크ㆍ인’된 ‘분예기’ 역시 “비천한 한 여성의 生命(생명)에 대한 집념을 생명의 존엄성과 영적인 의미에서 映像化(영상화)하겠다”고한다. “욕심 같아서는 새로운 思潮(사조)의 技法(기법)을 얼마든지 가미하고 싶으나 現實的(현실적) 제약 때문에 위축된다”고.
  ‘쿠장’의 <예술을 위한 예술>은 영화美學(미학)에 있어서도 역시 異端(이단)에 속하는가 보다. 앞으로 ‘언더그라운드 필름운동’은 계속 하겠다고 한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