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과 內通(내통)하는 達觀(달관)
■―오랜 沈黙(침묵)을 깨고 본교 國文科(국문과)출신인 閔雄植(민웅식)(신탁은행ㆍ대리) 金時泰(김시태)(濟州大(제주대)조교수) 두 詩人(시인)이 第(제)1詩集(시집)을 내놓았다. 東國文學會(동국문학회)회원으로 그간 詩作生活(시작생활)을 多年間(다년간)해 온 두 詩人(시인)의 詩集(시집)을 소개한다.
우리 詩壇(시단)에는 量産爲主(양산위주)로 내닫는 詩人(시인)이 많다. 매달 여러 편씩의 발표하고 한 해가 멀다하게 호화판 詩集出版(시집출판)으로 명예를 유지하는 詩人(시인)이 그것이다. 詩作生活(시작생활)을 영위하기가 여러모로 어려운 형편에 詩作(시작)활동이 왕성하다는 것은 분명히 다행한 일이긴 하다. 量産爲主(양산위주)라고 해서 나무랄 이유가 따로 없고 오히려 그 왕성한 意慾(의욕)과 底力(저력)에 敬意(경의)를 표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詩人(시인)의 生命(생명)은 쉬지 않고 詩作(시작)을 하는데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作品(작품)이 지니고 있는 무게와 그 質(질)에 의해서 持續(지속)되는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量産爲主(양산위주)로 만족하는 詩人(시인)가운데는 不渡手票(부도수표)를 남발하는 것과도 상 통 하는 난삽한 작품이 적지 않았던 까닭이다. 어떤 意味(의미)에서 詩壇(시단)의 저조는 量産詩人(양산시인)들의 不渡手票(부도수표) 남발에 그 一端(일단)의 책임을 지워도 좋을 것이다. 단 몇 편이라도 詩(시)다운 詩(시)를 남길 수 있다면 시인은 명예로운 地位(지위)를 결코 욕되게 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閔雄植(민웅식) 是認(시인)은 ‘데뷔’이래 多作(다작)보다는 寡作(과작)의 편에 있어 왔다. 어느 때는 수년씩을 沈黙(침묵)으로 一貫(일관)하는 때도 있었다. 詩壇生活(시단생활) 15, 6年(년) 만에 첫 詩集(시집) ‘崩壤(붕양)’을 내놓게 된 것은 그로서는 一大勇斷(일대용단)임이 분명하다. 물론 詩(시)의 옹호자들은 그가 비록 과작이라 하더라도 그를 결코 잊어버리지는 않고 있다. ‘崩壤(붕양)’은 이런 의미에서 그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그의 健在(건재)와 새로운 詩(시)의 展開(전개)를 약속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이 천지간에 나 하나 있다.
산이 물이 구름이 그리고 온갖 것이 비치는 마음하나 있었다. 산을 보곤 산이 되고, 물을 보곤 물이 되고, 구름을 보곤 구름이 되고… 그러나 제 모습은 못 비치는 하나의 거울처럼―.
그것은 오히려 뜻 없는 또 하나의 산이 아니었던가. 물이 아니었던가. 구름이 아니었던가. 너울거리는 풀잎이 썩어나는 나무토막이, 내던진 돌멩이가 아니었던가.
있어도 없는 것이 나는 아니었던가.
아니 천지간에 너 없이 홀로 있는 내 모습이 아니었던가.
-<거울> 一部(일부)-
閔雄植(민웅식) 詩人(시인)의 데뷔작인 <거울>은 50年代(년대)의 代表作(대표작)으로 꼽혀 왔다. 故(고) 趙芝薰(조지훈)씨가 추천사에서 그의 詩(시)를 ‘完美(완미)한 詩(시)’라고 말한 것은 어느 모로 보나 그를 정당하기 인정한 것이다.
그가 파악하고 있는 人生(인생)은 前期作品(전기작품) <거울>에 투영되고 있듯이 “있어도 없는 것”으로 요약된다. 詩(시)에서 人生論(인생론)을, 그것도 難解(난해)한 불교의 無我思想(무아사상)을 이만큼 詩的(시적)으로 昇華(승화)시키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웬만한 敎養(교양)이나 達觀(달관)을 기초로 하지 않고는 成功(성공)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우리는 이미 ‘나’라고 하는 自存(자존)의 世界(세계)를 초월해 있는 너그러운 포용을 이 詩集(시집)의 도처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과작은 永遠性(영원성)과 內通(내통)하고 있는 精神世界(정신세계)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만의 整理(정리)를 통하여 새로운 進展(진전)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三愛社(삼애사)발행ㆍ七一面(칠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