未來(미래) 향한 進一步(진일보)

  1. 아버지의 말
  ‘로마’의 共和政(공화정)을 죽음으로써 지킨 최후의 정치가인 ‘키케로’는 혼란을 극한 ‘로마’를 피하여 조용한 곳을 택해 아들을 ‘아테네’에 유학을 보냈다. ‘키케로’의 아들은 기원전 45년부터 43년에 걸쳐 ‘아테네’에서 공부했다. 아들을 유학시킨 후 아들이 열심히 공부에 충실하기를 바라는 아버지 ‘키케로’는 바쁜 중에서도 아들에게 틈틈이 편지를 띄웠다. 그러나 약간 정치적으로 아버지와 의견을 달리하는 아들은 풍부히 보내오는 학비를 가지고 술집에 출입하면서 아버지의 편지를 친구들에게 공개하고 비평하는 지경이었다. 그때 보낸 편지에는 나중에 <의무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등의 저서로 편집되어 오늘날에도 우리가 접할 수 있고 또 ‘키케로’의 간곡한 글발에서 영원히 변함없는 부성애의 따뜻한 입김을 느낄 수 있다. 지금 학생들을 대학에 보낸 여러 아버지들의 마음도 또한 ‘키케로’의 심정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뚜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1862년)의 아들은 ‘니히리스트’로서 보수적인 아버지와 사상적으로 대립하는 것으로 세대의 단절의 불행을 그렸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잘 듣지 않게 마련되어 있다. 과거가 현대를 지배한다지만 현대는 늘 과거에만 얽매어 있을 수 없으며, 앞으로 미래를 향해 과감한 모험의 한 발자국을 내딛어야 한다. 어쩌면 아버지는 부성애를 내걸고 아들에게 기성도덕의 속박을 강요하는 과거의 그림자일는지 모른다. 물론 미래에다가 더 비중을 두려고 하는 아들이 아버지의 말에 잘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하기를 인색해하는 이유는 알만도 하다. 그러나 따지고 볼 때 과거가 없는 현재나 미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의 말에도 들을만한 것이 있다함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학생들은 이 글을 아버지의 助言(조언)처럼 들어주기 바란다.

  2. 스승
  ‘키케로’가 유학간 아들에게 가장 역설한 것은 훌륭한 스승을 찾아 공부를 잘하라는 당부였다. ‘키케로’는 자기가 안면이 있는 ‘크라티포스’교수에게 아들의 교육을 의뢰했다. 1808년 ‘와이말’의 재상 ‘괴테’도 늦게 얻은 외아들 ‘아우구스트’를 ‘하이델베르그’대학에 유학시킬 때 그 곳의 유명한 ‘로마’법학자 ‘티보’에게 아들을 부탁하는 간절한 편지를 띄우기도 했다. 이것들은 훌륭한 스승을 아들에게 얻어주려고 애쓴 例(예)라 하겠다. 아버지와 아들은 피로 연결되지만 스승과 제자는 학문과 인격으로 결합된다.
  孔子(공자)님의 배움터에 모여들었던 제자들의 경우처럼 훌륭한 스승을 가진 제자가 또 어디 있었을까. 지금 새로 입학한 학생들이 넓은 ‘캠퍼스’안을 허전한 마음으로 방황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학생은 이미 배움의 첫 스타트에서 뒤진 것이다. 어느 대학에 지망할 때 먼저 ‘나는 어느 대학에 가서 어느 교수에게 무엇을 진심으로 배워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어야 한다. 그저 입학시험공부에 시달려 장래에 대한 방향을 잃어버린 학생들은 이를테면 눈 먼 기러기와 같다. 그런 기러기가 어떻게 제가 날아갈 방향을 정할 수 있을까. 늦게나마 눈을 뜨고 나아갈 방향을 하루속히 정하여야 한다. 학생들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곧 그대들의 지식과 인격의 원천이 될 스승을 택하라. 훌륭한 스승을 가진 제자야말로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다.

  3. 친구
  ‘키케로’는 아들에게 준 편지에다 썼다.
  ‘인생에 있어서 友情(우정)을 없애버린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태양을 없애버리는 것이나 같다.’
  孔子(공자)도 論語(논어)에서 친구를 예찬했다.
  ‘친구가 먼 곳에서 찾아왔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
  孟子(맹자)도 王倫(왕륜) 중의 하나로 친구 간에는 信義(신의)가 두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정은 우주의 넓이나 마찬가지로 넓다. 부자간은 피로 연결된 것이니까 가깝지만 육신의 情(정)과 世代(세대)의 벽이 가로막혀서 좁다. 남녀 간의 사랑은 육체가 매개할 뿐이지만 우정은 정신이 매개한다. 정신이 육체보다 보편적이므로 우정의 세계는 사랑보다 크고 넓다. 그러나 새로 입학한 신입생은 아직 스승도 발견 못하고 어슬렁거리다가 나쁜 친구에게 걸려들 위험이 크다. ‘셰익스피어’도 이 점을 경계하여 이렇게 말했다.
  ‘不實(부실)한 친구를 가질 정도라면 오히려 敵(적)을 가지는 편이 낫다.’
  釋迦(석가)도 이렇게 말했다.
  ‘길을 가려거든 나와 같은 사람, 또는 나보다 훌륭한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우매한 사람과 가는 것은 혼자 가느니만 못하다.’
  그럼 어떤 사람을 친구로 택할 것인가.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제시했다.
  ‘그저 재간이 있는 사람보다는 정직한 사람, 마음씨가 고운사람, 특히 친절한 사람, 관대하고 곧 찬성해 주는 사람이라면 친구로 택할 만할 것이다.’

  4. 여자
  어느 신문에서 실시한 대학수석 입학생들의 좌담회에서 어느 남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이제 지긋지긋한 입학시험도 끝났는데 여자친구도 사귀겠습니다. 대상자는 가급적이면 ‘한국적이 아닌 여자’였으면 좋겠습니다. ‘헤밍웨이’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의 여주인공 같은….”
  이건 어처구니없는 말이 아닌가. 입학시험이 끝난 것으로서 자기의 학교 교육과정이 다 끝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입학시험 공부는 겨우 인간교육의 기초과정을 종료한 것뿐이다. 지금부터 완성교육이 막 시작되는 순간에 처해 있다. ‘끝난’게 아니라 막 ‘시작’된 것이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이런 방심상태는 크게 경계해야 한다. 출발점에서 꽉 잡아 놓아야 한다.
  여자친구나 사귀겠다는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은 흡사 카메라를 둘러메고 캠퍼스에 관광여행을 온 기분이나 다름없다고 본다.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 또 공부다. 공부 외엔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결심으로 나가야 한다.
  내가 중학교 때 선생님들께 들은 宋(송)나라 眞宗皇帝(진종황제)의 배움을 권장하는 詩(시)의 한 구절에 이런 것이었다.
  ‘書中有女顔如玉(서중유녀안여옥)’
  공부해라. 그러면 책에서 여자가 나오는데 그 얼굴이 옥 같으니라. 우선 여자는 학문의 길을 가로막는 아편이라고 생각해 두는 게 좋다.

  5. 著者(저자)와 저서
  나는 깊은 밤 조용히 내 서재에 홀로 앉아 있어도 외롭지 않다. 어떤 불행도 이겨나갈 수 있다. 孔子(공자)가 나에게 이야기해주고 ‘소크라테스’가 나에게 용기를 나누어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의 영원한 스승이요, 보호자다. 나를 가르쳐 주고 위해줄 뿐이지 나를 해치거나 속이지 않는다. 論語(논어)는 나의 평생의 행동지침이다. 내 정신의 ‘하이웨이’다. 수많은 저서와 저자들이 나와 함께 이야기하면서 함께 걸어간다. 내 주변의 살아있는 현존의 인간은 나를 해치기가 일수다. 학생들도 대학에 들어온 이상, 우선 책을 읽어야 한다. 읽다가 마음에 드는 저자를 발견하게 된다면 너의 일생의 보배가 될 것이다. 세상일은 내가 마음먹는 대로 되기 어렵다. 그러나 훌륭한 저자는 훌륭한 저서를 손에 들고 너희들이 찾아오기를 언제나 고대하고 있다. 다방으로 가지 말아라, 도서관으로 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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