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어 감는 안개 속에서 맑은 새벽 공기를 마시며 法悅(법열)의 해안을 떠본다. 그러나 안타까운 심정! -무참히도 부서진 옛 禪院(선원), 대들보만이 날 반긴다.
  지금도 안타까이 여기며 석가래 속에 풀만 자란 폐허를 조용히 관조한다. 필요와 불필요의 相對槪念(상대개념)에서 선원이 말없이 허물어졌듯 나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깨어질 운명. 인간은 괴로운 역사의 章(장)에서 生老病死(생로병사)의 눈물만을 되씹는 것이다.
  아카시아 이파리보다 많은 어리석은 중생-저들은 왜 각박하게 살아야 하는가? 비온 뒤 싹트듯 자란 수많은 빌딩속의 사람들이- “그들이 살아야 할 것은 무엇이기에, 또 무엇 때문에 이토록 서글프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서글픔을 금치 못한다.

  佛典(불전)에 ‘마음이 즐거운 자만이 道(도)를 알 수 있다’라고 쓰여 있다.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 중생이 육체의 쾌락에 혼미하여 정신이 좀먹어 들어감을 자각치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나는 정신적 지주를 가지고 있다. ‘육체와 마음은 다르다. 自我(자아)를 알려면 육체를 잊어라. 몸은 나의 부속물이니, 마음이 곧 나이니라.’라고 설법하시던 普敎(보교)스님의 영롱한 눈빛이 마음에 아른거린다. 좌선에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면 四端七情(사단칠정)은 깨어지고 자아를 알게 된다. 無念無想(무념무상)ㆍ無障無涯(무장무애)ㆍ諸行無相(제행무상)에서 나의 본성을 찾으려고 없어진 禪院(선원)의 폐허를 바라보며 아카시아 숲의 벤치에서 사색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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