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이용할 뿐-美國(미국)

  거지가 부잣집 식당에 초대받았을 때의 만족감 같은 것을 美國(미국)에 가서 대학도서관에 들어갔을 때 느꼈다. 그야말로 寶物(보물)섬 같았다. 보고 싶고 갖고 싶던 책이 거의 다 갖추어져있었고 언제나 읽을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法社會學(법사회학)에 관한 文獻(문헌)이 ‘엘릿히’에서 ‘웨버’를 거쳐서 ‘구르비치’에 이르기까지 완벽히 수집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도서관의 설비가 또 누구의 마음에나 다 들도록 호화판이었다. ‘엘릿히’의 독일어 原書(원서)를 이미 번역출판하고 건너갔던 나는 그 英語版(영어판)보았을 때 춤을 출 만큼 반가웠다. 그것을 대출하여 읽던 중 주임교수 ‘제롬ㆍ홀’박사가 와서 그 책을 좀 빌려달라고 했다. 누구의 분부라고 거역하랴. 빌려주었더니 三日(삼일)후 다 읽었다면서 반환해왔다. 나는 一年(일년)에 못 다 읽을 것을 三(삼)일간에 거뜬히 읽고 시원한 표정으로 반환해온 그가 英語(영어)를 상봉하는 국민임을 다시 한 번 부러워 할만 했으나 그보다 새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한 듯 느꼈다. 교수는 도서관 책을 이용할 뿐 자기 소유의 藏書(장서)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資本主義(자본주의) 下(하)에서는 生産手段(생산수단)을 일부 사람이 독점하고 대중은 거기에서 疏外(소외)되듯 책도 대학도서관에서 집중 독점하고 교수나 연구자는 그것을 이용하는데 그친다. 이것이 資本主義(자본주의)의 높은 단계의 상황이라 한다면 교수나 硏究者(연구자)가 藏書(장서)를 소유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家內手工業者(가내수공업자)가 베틀이나 물레를 소유하는 거와 마찬가지의 상태에 대응하는 것이며 특히 稀本(희본)을 가졌다하여 자랑하는 것은 封建領主(봉건영주)의 취미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책과 잡지 등 연구자료 일체를 자기 돈으로 사지 않고 또 자기 주택에 서재를 꾸며놓고 좋아하는 貴族趣味(귀족취미)에 감전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경계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귀국할 때도 책을 사지 않고 그 돈으로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좋은 전축 같은 것을 사가지고 왔다. 약간 사가지고 온 책도 一五(일오)년이 넘는 지금까지 한권도 전부 읽어본 적이 없는 실정이다. 요즘도 나는 生計(생계)를 고려하지 않고 읽을 시간조차 없는 책을 무작정 사들이지 않는다. 한국학자의 처지로 미국 같은 나라의 교수도 감히 하지 않는 짓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한사람이 제 빈약한 재산으로 책을 사 모은다한들 얼마나 사 모을 수 있을까. 그런 부르주아 취미는 애당초 단념한지 오래이다.
  社會科學(사회과학)에 있어서 학설은 눈부시게 변한다. ‘立法者(입법자)가 法律(법률)의 글자 석자만 고치면 전체 법률서적은 휴지통에 들어간다’. 일제시대의 법률책 중 오늘날 참고할만한 책이 과연 몇 권이나 될 것인가.
  먹을 것을 못 먹고 입을 것을 못 입고 가족의 영양관리를 희생시키면서 책을 사는 빈곤한 한국학자의 상황은 世紀(세기)의 비극이다. 빈약한 대학도서관에 의지할 수 없는 교수들은 자기 비용으로 자기주택에 서재를 꾸미고 책을 모아보려는 허망한 노력을 하는 것은 참혹하고 눈물겨운 일이다.

  내가 요즘 사는 책은 싸구려 文庫版(문고판)이다. ‘헤겔’의 ‘歷史哲學(역사철학)’도 岩波文庫版(암파문고판)으로 살 수 있게 되었으니 文庫版(문고판)이라 해도 무시할 수는 없다.
  書齋(서재)나 藏書(장서)에 관해서는 불유쾌한 추억이 얽혀져 있어서 생각하기 괴롭다. 고등학교시절의 책은 이북에 가져간 채로이고 대학시절의 책은 부산에 두었다가 다시 東京(동경)에 들어간 후 사 모은 책들은 京都(경도)에 두고 나왔고, 解放(해방)후 다시 사 모은 책은 서울로 이사해올 때 六(육)ㆍ二五(이오)가 터지던 날 아침에 釜山(부산)역에서 철도화물로 탁송한 후 행방을 못 찾게 되고 서울서 다시 사 모은 책들은 一(일)ㆍ四(사)후퇴시 延大(연대)신촌舍宅(사택)에 둔 채 모두 잃어버리고 피난시 부산서 사 모으기 시작하여 환도 후 계속 사 모은 것이 지금 겨우 내 서제의 三面(삼면)의 벽에 둘려 쌓여있다.
  계통적으로 모은 것은 ‘막스ㆍ웨버’를 비롯한 法社會學(법사회학)의 저서 美國(미국)의 現實主義(현실주의)에 관한 것을 약간 수집하였다. 나의 독서는 普通學校(보통학교)시절부터 중단 없이 계속 되고 있고 文學(문학), 哲學(철학), 社會科學(사회과학) 등 범위가 넓기 때문에 책을 사고 읽는데도 時間(시간)의 按配(안배)를 극히 조심하게 된다. 한편 나는 法學(법학)의 기반이 되는 韓國(한국), 日本(일본), 中國(중국), 몽고 등의 歷史(역사)에 관한 것들 古代中國思想(고대중국사상)에 관한 책들로 모으고 있다. 專攻(전공)은 糊口之策(호구지책)으로 그치게 하고 광범위의 趣味的(취미적)독서 혹은 散文(산문)을 쓰기 위한 독서를 하는 처지임으로 반드시 서제에서만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一五(일오)원짜리 버스 안에서도 읽고 기다리는 茶房(다방)의 의자위에서도 읽는다. 조용해야 읽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아늑해야 머리에 잘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유행어로 말한다면 讀書(독서)의 生活化(생활화)라 할 것이다.

  藏書(장서)의 盜難(도난)도 책에 대한 나의 追憶(추억)을 슬프게 한다. 美國(미국) 간 사이에 크게 외부로부터 도난을 당했고, 내부로부터의 도난은 쉴 새 없이 있었고 또 계속 중이다. 가족이 서재의 책을 훔쳐낸 수효만 해도 상당수에 달한다. 빌러간 채 돌아오지 않은 책도 적지 않다. 또 가족 혹은 친척들이 서재를 ‘不法占據(불법점거)’하던 일도 적지 않다. 아이들의 생일과 나이는 혹 잊을 때도 있으나 書架(서가)의 책은 暗夜(암야)에도 찾을 정도이다. 보다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날마다 서재의 책을 뒤지고 살 수 있는 것은 나의 유일의 행복이며 나에게 이러한 개인적 행복을 가질 수 있도록 귀중한 資本(자본)을 投資(투자)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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