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評(서평)은 評者(평자)의 內面(내면)을 吐露(토로)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 그 책에 대한 讀後感(독후감)같은걸 그 책의 間紙(간지)에다 꼭 쓰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讀書態度(독서태도)는 아주 훌륭하다. 독자들이 ‘독후감’을 쓰는 습관을 기르게 되면 文章家(문장가)로서의 素志(소지)를 닦는 길이 될 뿐 아니라 남들보다 더 그 著作(저작)내용을 파악할 수 있고 장차 일류 書評家(서평가)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독후감이 곧 하나의 서평인 것이다.
  독자들이 자기 나름의 유형무형의 서평을 한다는 것은 거기에는 독자의 사상의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흔히들 ‘書評(서평)’하면 斯界(사계)의 권위자나 학자들만이 쓰는 걸로 착각들 하고 있고 심지어 어떤 著作(저작)에 대해 서평을 한다는 그 자체가 저자에게 실례되는 일이며 외람된 짓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이처럼 서평을 忌避視(기피시)하는 경향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서평은 著作物(저작물)이란 무대에 있어서의 독자의 內面(내면)의 독백이므로 저작물이란 무대가 있음으로서 다시 말하면 이러한 독백이 있음으로서 저작이란 무대도 그 생기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의 저작물을 평가하는 이상 거기에는 평가하는 사람의 주관이라든가 지식의 수준, 학문적 배경, 취미, 경험 情感(정감)등의 차이에 따라서 동일한 책에 대한 서평내용이 評者(평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독자들이 어느 정도까지 정신적으로 그 저작의 내용과 합치하여 진정으로 독서를 하였는가에 따라서 서평 내용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 높은 평을 받은 책이라고 해서 반드시 영원성을 가지고서 후세에 傳統(전통)이 되며 인류의 복지나 문화의 진전에 기여할 것인가도 의문이다.

  이와 같이 서평은 어떤 절대적인 기준은 있을 수 없고 절대적인 가치를 인정할 수도 없다.
  독자가 쓴 서평이 그 당시는 자신의 뛰어난 觀察眼(관찰안)에 스스로 놀라울 때도 있지마는 어느 시기가 지난 다음에 읽어보면 등골이 오싹해지리만큼 그 저자에게 죄스러워질 때가 있다. 이와 같이 시간이 우리들을 무서워하게 만든 것은 시간이 먼저 증명을 하고 나중에야 해답이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평은 評者(평자) 자신의 投影(투영)이라고 생각할 때, 서평 그 자체는 그 자신의 하나의 정신적 著作(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떤 서평이라야만 훌륭한 서평이고 가치 있는 서평일까? 예를 들면 마르크스의 ‘哲學(철학)의 貧困(빈곤)’은 뿌루동의 ‘貧困(빈곤)의 哲學(철학)’에 대한 批評(비평)인데 그 내용은 原著(원저)보다 훌륭한 저작으로서 사람들은 그것을 서평이라고 하지 않고 독립된 저작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서머세트ㆍ모음의 ‘文學案內(문학안내)’는 개개의 문학작품에 대한 서평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나 그것 자신 훌륭한 저작인 것이다. 마르크스나 모옴과 같은 명인의 서평을 들은 것은 아주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나 우리들 주변을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평인지 新刊紹介(신간소개)인지 출판사의 선전광고인지 모르리만큼 저작의 무게와는 다르게 독자의 비판을 흐리게 하는 서평들이 더러 눈에 띄는데 이는 저자 자신을 위해서도 결코 명랑한 일은 못된다.

  서평이라고 하면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評者(평자)의 내면의 吐露(토로)이므로 거기에는 평자 자신을 비평하는 자료로서의 의미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어떤 책에 대한 평을 한다는 것은 평자자신에 대한 비평도 되어 그 자체를 주저하게 되고 두렵게 한다. 예를 들면 저자의 비위에 거슬리는 서평을 썼을 경우, 아무리 훌륭한 서평일지라도 저자가 진심으로 충고로서 그 서평을 받아들일 것인가도 의문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그 저작에 대해 과장이 되기 쉽고 적어도 서평의 필을 들었을 경우 평자의 기분이 무거워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앙드레ㆍ지드는 말하기를 著作(저작)은 ‘著者(저자)와 神(신)과의 合作(합작)이다’라고 했지만 오늘의 저작들은 저자와 독자와의 野合(야합)이라는 평들이 있다. 저작 그 자체로 시대에 따라 그 평가기준이 달라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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