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춘식 교수

“세살 버릇 여든 살까지 간다”는 말은 아마 누구나 알고 있는 속담일 것이다. 대부분의 속담이 그렇듯이 이 말은 너무 자주 들어서 평소에는 그 의미를 되새겨 생각해 보는 일이 거의 없는 ‘상투적인 격언’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격언’들은 삶의 보편적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에, 또 그 빛을 발하고는 한다.

‘습관’이란 좀처럼 고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말은 ‘처음부터’ 정성을 다해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도 담고 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라든가 “시작이 반이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초심으로 돌아가자”라는 말들이 모두 ‘처음’ 또는 ‘시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잠언들인데, 그 속뜻은 나쁜 습관이 들지 않도록 처음부터 정성을 다해 신중하게 실천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모든 행동은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고 몸과 마음에 무엇인가를 남기는 법이다.

불교의 ‘업(業)’도 이런 습관과 행동의 결과가 만들어 낸 ‘나쁜 영향’과 ‘좋은 영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선업’을 쌓음으로써 ‘진리’를 깨달아 갈 수도 있지만, ‘악업’을 쌓아감으로써 더욱 ‘미망’ 속에 허덕일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중생’이라고 한다. ‘제 눈에 안경’이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본다”는 말이 편견에 쌓여 ‘미망’에 빠지는 상황을 가리키듯이, 편견이란 곧 나쁜 습관의 결과이다. 경험을 통해 진실을 꿰뚫어 볼 수도 있지만, 잘못된 경험에 의해 세상을 왜곡하여 바라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의 세계뿐만 아니라 일상적 삶에서도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어쩌면 사람의 성격이나 됨됨이는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작’과 더불어 반복해서 쌓인 ‘업’ 즉 ‘습관’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보면, ‘시작’의 중요성은 바로 새로운 ‘습관’과 ‘업’을 만들어 가는 순간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 같다. 내일의 ‘나’는 바로 오늘의 ‘나’가 만든 습관의 결과라고 하는 점, 평범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이 진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한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나’가 어제의 습관의 결과라면, 나의 단점을 고칠 수 있는 사람 또한 ‘나 자신’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탓하기 이전에 ‘나 자신’을 돌아보고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처음’을 사는 사람이다.

“부처도 업보는 피할 수 없다”고 한다. 이 말은 그 업보의 무서움을 말하기보다는 진정한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습관의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이기 때문에, 우리는 반성하고, 또,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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