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한 平生(평생) 苦行(고행)과 參禪(참선)…肉身(육신)은 가셨어도 法身(법신)은 불멸

  또 하나의 佛敎界(불교계) 巨星(거성)이 열반의 길에 드셨다. 자신의 수도 정진과 중생을 향한 자비로 7旬(순)의 일생을 살아오신 李靑潭(이청담)대종사―
  친근한 人間(인간)의 벗으로서 민중의 지도자로서 살다 가신 큰 스님의 보람과 파란으로 점철된 一代記(일대기)를 엮는다. <편집자>

  ○…賢者(현자)의 序章(서장)…세속時代(시대)
  佛敎界(불교계)는 물론 이 나라와 민족의 거대한 한 정신적 支柱(지주)로 살다 가신 靑潭(청담)스님은 이미 國運(국운)이 어두워오던 1902년 慶南晋州(경남진주)에서 출생했다.
  李淳浩(이순호)로 불리던 少年期(소년기)에는 그도 어느 다른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書塾(서숙)에서 漢文(한문)을 익혔다. 그러나 사색하는 바가 깊던 소년은 한문을 익히는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항상 오똑하게 서서 무엇인가에 깊이 잠기고 있는 그는 그래서 곧잘 같은 學童(학동)들에게 ‘부엉이’라 불리곤 했다.
  賢者(현자)의 序章(서장)은 이렇게 깊은 冥想(명상)과 함께 조용히 열리고 있었다.
  별로 맞지 않은 書塾(서숙)을 집어치우자 부친은 그를 晋州(진주) 제일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17세의 늦은 나이였다.
  그때부터 그는 꿈에 가득 찬 소년이 되어 新學問(신학문)에 열의를 다했고, 모든 면에 벌써부터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로서는 하나의 커다란 변화였다.
  日人(일인) 교사에게서 공부하면서도 그는 당시 조국이 처한 현실을 생각했고 순종만을 미덕으로 여기는 안일한 학우들에게도 우리나라의 독립정신을 일깨워갔다. 3ㆍ1운동이 일어나던 해, 조숙했던 그는 처음으로 본 태극기를 높이 들고 군중의 맨 앞에 서서 만세를 부르며 大邱(대구)를 향해 행진하다 붙잡혀 심한 고문과 獄苦(옥고)를 겪기도 했다. 집안의 長男(장남)인 까닭에 日本(일본)유학을 포기하고 진주農高(농고)에 응시했을 때 처음 不合格(불합격)의 고배를 마신 것도 만세운동에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한때의 일로 모든 것을 제압하려는 日帝(일제)의 소행에 분노를 느낀 그는 日人(일인) 校長(교장)을 만나 5일 동안의 담판 끝에 결국 晋州(진주)고등농림학교에 입학할 수가 있었다.
  晋州(진주)농고 1학년 때 장남이자 외아들인 그는 집안의 代(대)를 이어야한다는 한국의 전통적 思考(사고)와 관습에 따라 부모들에 의해 성급한 결혼을 치러야 했다. 그때 나이 21세. 이 世緣(세연)이 훗날 그의 깊은 人間的(인간적)인 번민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보다 높은 차원에로의 超克(초극)이 오늘의 靑潭大宗師(청담대종사)를 있게 했다.

  ○…시련 넘어선 大願(대원)의 出家(출가)
  農高(농고)시절 진주 護國寺(호국사)에서 어느 스님과의 對話(대화)는 우연한 것이었지만 청년기로 접어든 그에게는 새로운 운명의 一大轉機(일대전기)였다. ‘무엇이 나를 지배 하는가’ ‘마음이란 무엇인가’ ―한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에게는 전혀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고 드디어는 出家(출가)를 결심하기에 까지 이른 것이다. 그것은 무서우리만큼 지독한 집념이었다.
  儒家(유가)의 家風(가풍)이 있는 집안인데다 이미 결혼한 몸이었지만 새로 눈뜨기 시작한 인간의 本質(본질)을 향한 그의 宗敎的(종교적) 결심은 도저히 굽일 수가 없었다.
  흰 눈이 내리는 어느 겨울날, 진주에서 海印寺(해인사)까지 걸어서 찾아 갔다. 학생이라는 이유 때문에 첫 번째 出家(출가)는 거절당했다. 얼마 후 다시 白羊寺(백양사) 雱門庵(방문암)의 宋滿空(송만공)스님을 찾아갔으나 만나질 못했다.
  두 번째 出家(출가)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외아들의 出家(출가)결심에 늙은 어머니와 젊은 아내는 울었고 부친은 상심한 끝에 끝내는 그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영원한 열반의 길을 찾겠다고 저들을 남겨놓고 떠나야 하는 그의 심정은 너무나 큰 시련을 감내하며 또 하나의 다른 自身(자신)과 억척스레 싸우고 있었다. 세속적인 의리와 그 반대의 것이 서로 지지 않으려고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부친의 별세는 너무나 심한 세속적인 보복이었다. 그러나 끝까지 出家(출가)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두 번이나 出家(출가)에 실패한 그는 知人(지인)의 안내로 出家(출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兵庫縣(병고현) 松雲寺(송운사)의 ‘아끼모도’師(사)에게서 佛門(불문)을 修學(수학)하기 시작했다.
  晋州高等農林(진주고등농림)을 막 수료한 24세의 한창 젊은 나이였다.

  ○…중생을 향한 求道(구도)와 遍歷(편력)
  參禪(참선)수행을 바랐던 그는 敎學(교학)중심인 일본불교에서 별 수확도 없이 2년 7개월 만에 귀국, 慶南(경남) 固城(고성) 玉泉寺(옥천사)에서 朴(박)영호師(사)에게서 정식 得度(득도)하여 戒(계)를 받았다.
  그때부터 피나는 求道(구도)와 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바랑을 짊어지고 누더기를 걸친 채 염주를 들고 雲水納子(운수납자)의 苦行(고행)수도를 계속했다. 구름처럼 흘러 머문 곳이 서울 安岩洞(안암동) 開雲寺(개운사) 大願(대원)불교 전문강원. 당시 敎界(교계)의 碩學(석학)이던 朴漢永(박한영)스님이 經論(경론)으로 名講(명강)을 떨치고 있었다. 여기서 經(경)ㆍ律(율)ㆍ論(론) 三藏(삼장)을 익혀 大敎(대교)과정을 履修(이수)했다. 이렇게 佛門(불문)에 귀의한지 4년이 흘렀다. 그러나 때때로 그를 괴롭히는 번민이 있었다.
  아직 世緣(세연)이 다 끊기지 않은 스님에게는 하나의 유혹이기도 했다.
  방관할 수만은 없는, 세속에 남겨둔 아내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결연히 결심을 한 어느 날 아내와의 離婚(이혼)을 위해 고향인 晋州(진주)로 향했다. 스스로 구속을 벗어나고 아내에게도 재혼의 기회를 주기위한 수도자의 엄숙한 각오와 인간적인 양심에서였지만 그 발걸음은 역시 무거운 것이었다. ‘나는 그럴 권리가 있을까. 그들을 불행으로 몰아넣고 나 혼자만의 精進(정진)의 길을 걸을 의의가 있을까. 그게 오히려 더 큰 업보가 아닐까.’―이런 번민들은 그 후 이혼수속이 끝난 다음에도 이따금 그를 괴롭혔다.
  일단의 ‘형식적’인 처리가 끝난 다음 그는 오로지 精進(정진)에만 일념으로 내달았다.
  그 크나큰 시련과 싸움에서 견디어낸 무서운 意志(의지)앞에는 오직 見性成佛(견성성불)로 향해진 길만이 전부였다.
  전보다 더 철저한 苦行(고행)과 정진이 계속되었다. 苦行(고행)이란, 글자 그대로의 苦行(고행)이었고, ‘無(무)’를 觀(관)하는 정진은 앉고 서고 눕는데 까지도 쉬일 줄을 몰랐다.
  중생을 향한 피나는 구도였다. 20여년간 수도 끝에 드디어 忠南(충남)예산 定慧寺(정혜사)에서 見性(견성)을 했고, 고향인 晋州(진주)불교신도회의 초청으로 20여년 만에 고향에 내려가 說法(설법)을 베푼 것은 佛陀(불타)가 悟道(오도)후 고국인 카필라城(성)에 돌아와 法(법)을 편 것과도 흡사했다.

  ○…淨化佛事(정화불사)의 旗幟(기치)를 들고
  한마디로 그의 일생은 佛敎淨化(불교정화)를 위해 바쳐졌다. 그가 아직 수도하는 納子(납자)로 있을 때부터 불교淨化(정화)를 위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日帝(일제)의 잔재로 佛法(불법)에 대처승이 허용되고, 그로 인해 신성한 寺院(사원)과 佛法(불법)이 부식되어감을 안타깝게 여긴 그는 1930년 宋滿空(송만공)스님의 격려를 받으며 全國(전국) 심산유곡의 젊은 수도승들을 찾아다녔다.
  불교정화를 위한 동지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때의 여건으로서는 佛敎(불교)정화의 운동은 너무나 큰 과제였고, 따라서 그를 위한 전초작업인 수도승들의 규합에도 수많은 애로가 수반되었다.
  온갖 악조건을 무릅쓰고 正法(정법)수호의 일념만으로 뛰어다닌 스님의 보람으로 그해 서울에서 50여명의 젊은 승려들이 모여 全國學人大會(전국학인대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日帝(일제)가 가장 주시하는 게 불교단체였기 때문에 이도 얼마 지나 탄압으로 인해 강제 해산되어 최초의 淨化佛事(정화불사)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동안 점차 승려로서 충분히 성숙해진 스님은 그러나 淨化佛事(정화불사)만은 꼭 이룩하고 말리라는 서원이 있었고, 그것은 佛敎界(불교계)를 위한 일만은 아니었다. 결국 대과업을 위한 막이 올랐다. 1954년 8월 서울 禪學院(선학원)에서 전국 비구승 대표자 회의를 주도하여 숙원이던 불교정화운동을 발기했다. 正法(정법)을 수호하려는 무서운 결의의 투쟁이었다.
  정화운동을 발기한 다음해인 55년 와중에 있는 불교종단의 행정수반인 曹溪宗(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에 취임했다.
  그 후로도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총무원장 재임, 통합종단 제2대 宗正(종정)등을 역임하면서 淨化(정화)불사를 계속해갔고 佛敎界(불교계)의 질서가 얼마만큼 바로잡히자 다시 佛敎維新(불교유신)운동을 통해 불교 현대화와 대중화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앞장서 실행한 佛敎維新(불교유신)
  凡人(범인)으로서 감히 엄두도 못 낼 정열과 信念(신념)의 化身(화신)이었다. 事判(사판)이기보다는 순수한 理判(이판)측이면서도 너무나 많은 일을 감당해낸 그에게는 宗團(종단)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불교의 대중화라는 보다 거시적 이념을 지닌 종교와 민중의 지도자였다. 지칠 줄 모르는 그의 구도와 중생을 위한 자비는 좀 더 현실적으로 구체화 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불교 현대화 및 대중화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佛敎維新(불교유신)운동을 전개했던바 이것도 淨化佛事(정화불사)의 일환이었다.
  69년 8월 이 같은 유신운동이 宗團(종단)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계종 탈퇴선언으로 한때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70년 7월 다시 조계종총무원장에 취임한 스님은 조계종에 새바람을 일으킬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했다. ①불량, 잡승을 일소하기 위한 승단의 기강확립 ②불법을 바로잡기 위한 護法國(호법국)의 구성 ③승려의 재교육을 위한 중앙교육원과 僧伽大學(승가대학)의 설립 ④일반대중들이 불교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불교聖典(성전)의 편찬 등이 그것이었다.
  임기를 채마치지 못하고 他界(타계)하고 말았지만, 이 같은 목표는 착착 진행되어왔고 또 미해결로 남아있는 부문도 기초가 다듬어져있다. 불교대중화와 현대화에 심혈을 기울인 그는 “나를 찾자, 나를 알자 내가 살자”고 대중 및 신도와 젊은 佛子(불자)들을 위한 설법을 베풀기에 寧日(영일)이 없었고 최근 道(도)선寺(사)에 胡國(호국)참회원을 건립, 종교인으로서의 국가사회 봉사에 몸소 실천을 보였다.
  특히 他宗敎(타종교)와도 폭넓은 교류를 맺으면서 사회정화를 위한 공동전선을 펴기도 했다. 사소한 세속의 정을 무자비하게 팽개치고 出家(출가)했었지만, 그는 이렇게 보아 더 크게 裟婆(사파)를 사랑한 때문이었다.

  ○…큰스님 裟婆(사파)를 떠나시다
  언제 봐도 해맑은 童顔(동안)에 感化(감화)가 넘치던 스님은 7순으로 보기에 너무 정정했다. 열반에 들기 하루전만해도 신도법회에 나가 6차례나 설법을 베풀었다.
  生死(생사)가 차별이 없기 때문에 열반을 하루 앞두고도 그렇게 生(생)의 길을 걷다가 死(사)의 길로 湛然(담연)하게 옮겨갈 수 있는 것일까.
  “세상의 일체중생이 모두 성불하고 난 뒤에라도 나는 최후까지 남아서 정화와 포교에 힘쓸 것이고, 또 죽어서 다시 이 세상에 태어 난데도 前生(전생)의 길을 후회 없이 밟고 싶은 심정일 뿐…”이라던 스님은 이제 大圓寂(대원적)에 드셨다.
  1971년 11월15일 밤10시 정각.
  평생을 통해 이룩해놓은 佛敎中興(불교중흥)이 꽃이 채 發花(발화)하기도 전에 스님은 가을의 마지막 잎새처럼 조용히 지신 것이다.
  그러나 큰 스님의 肉身(육신)은 裟婆(사파)를 떠났지만 法身(법신)은 영원히 迷界(미계)의 중생들과 함께 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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