覺(각)은 通路(통로) 따로 없다

  음력으로 2月(월)15일은(3월11일) 열반祭日(제일)이다. 부처님의 열반은 우리의 죽음과 무엇이 다른가? 따라서 일반의 억측대로 죽음의 美化(미화)인지 아닌지? 經(경)에 이르되 ‘一切苦(일체고)를 여인 것을 열반이라’ 했으니 이것은 무슨 말일까? 또 經(경)에 ‘衆生(중생)이 곧 부처다’했으니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옳을까. 열반이 哲學的(철학적)으로 理解(이해)되기 위해서는 우선 自由(자유)에 대한 佛敎的(불교적) 관점이 밝혀져야 한다. 이것을 필자는 ‘衆生是佛(중생시불)’을 通(통)하여 철학적인 解明(해명)을 꾀하고자 한다. 열반의 문제는 覺(각)의 문제며 自由(자유)의 문제요 佛(불)은 곧 覺(각)이요 열반이기 때문이다. 主(주)로 ‘禪門撮要(서문촬요)’를 참고하였다.

  涅槃(열반)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열반의 본질을 물음은 一切(일체) 衆生(중생)의 疑題(의제)거리가 못된다. 衆生(중생)에게는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요 열반은 云謂(운위)할 바 못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따라서 涅槃(열반)이 佛(불)의 本性(본성)에 관계되어있는 것이라면 佛(불)은 衆生(중생)이 衆生(중생)의 죽음을 다시 論(논)하지 않듯이 佛(불)의 열반을 論(논)치 않을 것이다. 衆生(중생)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佛(불)의 열반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또한 고약한 말이다. 經(경)에 이르시되 ‘衆生是佛(중생시불)’이라 하였으니 佛(불)이 衆生(중생)과도 다름없다는 뜻이라 본래 구별이 없는 데에 衆生(중생)과 佛(불)이 서 있는 것일진대 ‘죽음’과 ‘열반’의 두문이 있음은 어떠한 까닭으로 그러한가.
  本來(본래)로는 중생과 佛(불)이 둘이 “아니다” 이 “아니다”라는 말은 다양을 직감케 한다. 일컬어 이러한 例(례)를 들 수 있겠다. 즉, 중생이 중생임은 그가 佛(불)이 “아니기” 때문일 뿐, 다른 理由(이유)는 없다. 또 佛(불)이 佛(불)임은 佛(불)이 중생이 “아니기”때문일 뿐(본래로 구별이 되는) 다른 이유란 없다. 우리의 課題(과제)는 단순하고 일관된 이 부정 “아니다”의 근거에 있다. 설정된 문제 ‘죽음’과 ‘열반’은 이 근거가 자연히 들어나게 됨으로써 분명하여 질 것이다.
  그리고 본래 佛(불)과 중생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佛(불)이 곧 중생인 까닭이 일컬어 同一本性(동일본성)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同一(동일)의 本性(본성)이라면 구태여 佛(불)의 이름이 있고 衆生(중생)의 이름이 있을 리 없다. 종합하여 이르건대 佛(불)과 衆生(중생)은 본래로 다를 것이 없는 데에 있다는 다른 이름(異名(이명))이다. 佛(불)과 衆生(중생)은 不異中(불이중) 異(이)이다. 무엇이 不異(불이)이고 무엇이 異(이)인가. 일컬어 ‘다름이 없는 곳’은 무엇이고 ‘다른 이름’은 무엇인가.
  佛(불)과 衆生(중생)은 따로 있지 않고 다만 그와 같이 불리는 것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확실히 큰 문젯거리이다. 이것을 깨달아 대답 못할 지경이라면 이 답답함이란 실제로 一切處(일체처) 一切時(일체시)의 골칫거리이기 때문에, 곧 知性(지성)있는 者(자)라면 生死(생사)의 直接(직접) 가름길이나 다름없다. 하나를 모르면 一切(일체)를 모르는 것이요 과연 아는 것이 아니요. ‘모르는’ 한 ‘모름’은 나의 本身(본신)이며 그러므로 나의 목숨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佛(불)이 무엇인지 모르니 衆生(중생)을 알 길이 없고 衆生(중생)이 무엇인지 모르는 한 佛(불)도 모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經(경)에는 다음과 같이 說(설)하여있다. 衆生是佛(중생시불).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물음이 다시 물어져야 한다. 衆生(중생)이 佛(불)이라면 이 문제되고 있는 구별은 왜 일어났는가? 이 문제가 노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얼핏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衆生是佛(중생시불)은 衆生(중생)(A)과 佛(불)(B)의 논리적 同一性(동일성)의 주장이라 볼 수 없다. 만일 소박한 뜻에서 이를 定立(정립)코자 했다면 ‘色卽是空(색즉시공), 空卽是色(공즉시색)’이라 하여 同語反覆(동어반복)을 하는 경우가 도무지 뜻 없는 것으로 되고 말 것이다. A=B일 때 B=A임은 自明(자명)한 것이요 다시 언급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흔한 例(예)들을 보건대 만일 이것이 강조하기 위한, 혹은 기억을 위한 形式論(형식론)이라면 이 형식은 修辭上(수사상)의 幼兒(유아)단계일 것이요, 또 矛盾律(모순율)의 形式(형식)을 본뜬 ‘色不異空(색불이공), 空不異色(공불이색)’만을 사용함으로써도 넉넉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형식상 이 바꾸어 다시 언급하는 데에는 그 부정이나 긍정형태에 있어 특유의 목적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문제 자체에서 보아도 논리상 衆生是不(중생시불)은 근거가 없다. 어떠한 전제도 아니요 결언도 아니다. 도리어 두 개의 사항은 대립이요 부정개념이므로 실제로는 否定(부정)(A≠B)의 否定(부정)인 肯定命題(긍정명제)(그럼에도 불구하고 A≠A, B≠B이므로 A=B이다)처럼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의도로는 A(佛(불))가 非(비)A(衆生(중생))와 同一(동일)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있다할 것이다. 사실을 말한다면, 따라서 現實的(현실적)으로 A가 非(비)A와 同一(동일)함으로써 진실과 허위가 같고 幸(행)과 不幸(불행)이 동일한 것이라면, 그러므로 一卽多(일즉다)요 衆生卽不(중생즉불)이라면 8만4천 법문은 一切(일체)가 無用(무용)한 것이 아닌가. 대립이 통일되고 일체의 모순이 해소된다면, 그리하여 평화가 모든 究極(구극)의 투쟁 안에 존재한다면 열반은 이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우리의 분별력 있는 知性(지성)은 이 對立者問(대립자문)의 통일을 일찍이 본질세계라 하여 현실의 무상한 조건을 위의 지배력 있는 王權(왕권)으로서 설정하곤 하였다. 통일은 그 자체 絶妙(절묘)한 法(법)이며 心性(심성)의 自己顯示(자기현시)로 불리어 왔던 것이다. 佛敎(불교)는 특히 이 心法(심법)을 주장한다. 經(경)에도 ‘觀心一法總攝諸行(관심일법총섭제행)’이라 하여 마음보는 한 가지 法이 一功(일공) 世界(세계)를 다스리는 바라고 했던 것이다.
  애초에 衆生(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것이 모두 ‘마음’ 하나를 두고 한 말임을 따로이 알릴 것도 없다. 佛(불)이란 그 뜻이 覺(각) 곧 깨달음이니 깨달음을 佛(불)이라 이름하고 깨닫지 못한 것을 衆生(중생)이라 이름 할 뿐이요 본래로는 ‘그 마음에 있어’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自性中(자성중)의 佛心(불심) 곧 깨달음 그 자체로 본다면 衆生(중생)이 곧 佛(불)이요, 따라서 衆生(중생)의 죽음도 해탈의 地境(지경)과 다름이 없다. 열반은 一切(일체)의 苦(고)를 부수어 떠남이요 일체 장애를 뛰어 넘어선 것으로서 이를 흔히 解脫(해탈)이라하고 그러므로 참된 自由(자유)를 이르는 말이다. 消極的(소극적)인 自由(자유)는 속박을 벗어남이나, 至上(지상)의 自由(자유)는 깨달음 그 자체로서 自由(자유) 그것도 여의는 것이 佛心(불심)의 本(본) 그릇(器(기)) 됨이다.
  이 구체적인 분석적 태도는 간혹 有用(유용)할 것으로 여겨진다.

  衆生(중생)은 개인적으로 그가 죽을 때 고통과 함께 죽는다. 苦(고)는 衆生(중생)죽음의 構成因(구성인)으로서 개인의 전체이기도 하다.
  즉 衆生(중생)은 苦(고)의 존재로서 苦(고)로부터 태어나서 苦(고)와 同居(동거)하다가 苦(고)와 함께 죽는다.
  衆生(중생)은 이 때 죽음과 동시에 苦(고)를 죽임당하지만 이것은 겨우 통증을 면하는 것이요 苦(고)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苦(고)는 비록 그 거처를 잃었다할지 모르지만 苦(고)자체 ‘衆生心(중생심)은 곧 苦(고)요, 苦(고)에 붙어 죽었으므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없어지지 않는다. 苦(고)는 衆生存在(중생존재)의 분질이요 그 전제이다. 苦(고)는 衆生(중생)이 죽는 마당에 있어서도 결코 상실되지 않고 衆生(중생)의 등에 엎혀 있다.
  아니 衆生(중생)은 그 죽음에 있어서도 가만히 滅(멸)하는 것이 아니고 自己自身(자기자신)을 부정 혹은 긍정한다. 말하자면 意識(의식)의 勞役(노역)으로서 자신을 그대로 자체로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항상 對象化(대상화) 함으로써 ‘自己(자기)-아닌-것’속에서 사는 데에 온 정열을 바친다. 그리고 이 말은 不自由(부자유) 속의 生活(생활), 곧 참된 苦(고)를 말한다.

  중생의 죽음은 自己(자기)의 일이 아니다. 언제나 ‘제 밖의-일’이며 ‘자기-아닌-것으로서’의 죽음이다. 즉 본래 自己(자기)는 죽는 일이 없다.
  중생이 그대로 부처임은 이러한 스스로의 깨달음에서 가능하다. ‘자기-아닌-것’을 알면 곧 ‘자기’를 알게 되는 것이요, 이를 우리가 ‘깨달음’이라고 부를진대 覺(각)이란 根源(근원)에 있어서 ‘存在(존재)의 自明(자명)’이고, 말을 바꾸어 하면 ‘自體者(자체자)의 自己顯示(자기현시)’이다. 왜냐하면 自己(자기) 아닌 것으로서 죽는 한 사실 분명한 것은 ‘自身(자신)으로부터-벗어나-있는-것’이요, 이 分明者(분명자)는 곧 ‘나’이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결론이 가능하다. 衆生(중생)과 佛(불)의 區分(구분)들에 있어서 열반이 하나의 ‘깨달음 一方便(일방편)’이요. 문제가 되는 것이 이 區分自體(구분자체)이다. 그리고 自體者(자체자)는 그대로 自明(자명)한 것이요. 이를 覺(각), 또는 涅槃(열반)이라 부른다. 더구나 覺(각)에는 通路(통로)가 없다. 自明(자명)한 것은 一切處(일체처) 一切時(일체시)가 그대로 亦然(역연)한 그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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