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시인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가시내야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네, 우린 때로 따분하고 지루할 때 어떤 사건이 일어나길 바랄 때가 있어요.
  우리 정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영혼 깃든 생명의 정화가 내리 깔리는 그런 속에다 사건을 만들어 보는 거여요.
  인생 그 자체에 대한 가혹한 의문을 해보기도 하고 자기가 미루어 오던 일의 사색에라도 빠져 보기로 해요. 이 3月(월) 아침에.
  거리의 가로수는 조금은 늙은 얼굴로 졸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네 가슴은 무언가 좀 달랐어요. 그 날 우리들은 무언가 조금은 다른 의미를 되씹어 보았던 거여요. 남북 적십자회담이 갈대꽃 우거진 임진강 나루의 초라한 집에서 열렸던 거여요.
  남북 적십자 회담. 네, 그게 우리들의 꿈과 소망을 한꺼번에 이루어 주리라곤 생각지 않겠요. 어쩌면 온통 상처투성이인 세월의 앙금, 저 어두운 하늘 끝에서의 일을 가지고 우리들의 가슴은 설레었던 거여요. 우리들의 꿈이 너무 절실한 것이었기에.>

  봄이 오는 문턱에서 지난 가을, 그 날의 예술가를 생각해 본다.
  <가을은 많은 예술가들이 일해 온 계절이었어요. ‘슈베르트’가 이층 다락방에서 아름다운 가곡을 쓸 때도 가을이었고, 화가 ‘로미에’가 파리의 뒷골목을 곧잘 그릴 때도 가을이었죠. 시인 서정주씨가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거울에 국화를 비춰보던 때도 그 때가 가을이었어요.
  가을, 그 계절은 시골 서커스단이 포장을 거두고 떠나 버린 궁지의 모습 같기도 하죠. 공원벤치에 노인의 백발이 우수의 마른 햇살에 반짝이는 계절, 많은 예술가들이 휘날리는 가랑잎 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을 걸어갔었죠.
  ‘에로스’ 그건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어요. 그리스 신화 중 ‘플라톤’의 ‘향연’에 의하면 ‘에로스’는 아버지 ‘포러스’와 어머니 페니어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고 해요. ‘포러스’는 부유를 가리키고 ‘페니어’는 빈곤을 가리키지요. 부유와 빈곤사이에서 태어난 게 곧 ‘에로스’여요.

  그래서 사랑은 포만의 것이고 결핍과 빈곤을 또한 나타내고 있어요. 사랑이란 늘 만족되지 않는 것이고 끝없이 결핍을 느끼면서도 낭만을 희구할 수 있는 거죠. 사랑은 영원히 만족 못 하는 행복이여요. 사랑할 수 있는 나의 사람들은 그 가을에 사랑의 참 된 의미를 생각하는 계절이 되어야 했었지요. 이 세상을 살아간 위대한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제4의 사나이에서 라스트 씬은 너무도 인상적이었어요.
  끊임없이 치타가 흐느끼는 계절, 그 가을의 음악이야말로 낡은 악기가 흐느끼는 것 같은 거요. 아! 우린 그런 중세의 낡은 치타가 흐느끼는 그런 속을 걸어보는 거예요. 가을은 그런 속을 걸어보는 거예요>
  아, 참 우습다. 발랄한 이 봄 아침에 왜 이다지 가을을 생각하고 있을까? 목이 말라서 인가. 아니면 저 숲 사이를 타고 흐르는 차디찬 바람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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